런던정경대학(LSE)의 리차드 세닛이란 사회학자가 블레어 영국총리와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을 비교한 글을 썼다. 두 사람 모두 참신한 이미지와 비전, 탁월한 논리와 대중 설득력으로 입신한 점이 닮았다. 그러나 클린턴이 섹스 스캔들로 도덕성이 훼손된 뒤 국민의 국정 신뢰도가 오히려 상승한 데 비해, 블레어는 이라크 침공을 둘러 싼 국제 논쟁까지 주도하며 위상을 높인 듯 하면서도 갈수록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는 것이 다르다는 요지다.이 아이러니의 연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클린턴은 참담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비롯한 국정에 매진했고, 유권자들은 대통령이 개인적 과오를 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저마다 인격적 결함을 지닌 국민은 대통령의 몸을 낮춘 고해(告解)와 헌신에 신뢰를 보냈다는 분석이다.
그에 비해 블레어는 기성 질서에 도전하는 개혁을 추진하면서 언론과의 논쟁은 물론이고 법정까지 가는 정당성 다툼에 과감했고, 대개 승리했다. 그러나 국민은 거듭된 사회적 논쟁에서 블레어가 '우리는 언제나 옳다'고 외치는 것에 소외를 느꼈고, 정치와 권력을 왠지 공허한 것으로 인식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그 결과 블레어의 논쟁력이 돋보인 이라크 침공 결정과정에 거짓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자 민심이 한꺼번에 이반(離反)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회 저변의 개혁 열망과 대중적 설득력을 자산으로 집권한 점에서 두 지도자와 비견할 만 하다. 그러나 집권 뒤 국정 수행 자세는 그들의 성공을 이끈 미덕을 닮기보다, 실패를 자초한 위선과 아집으로 치닫는 인상이다. 그 것도 두 지도자가 괄목할 국정 성과에 도취한 권력의 권태기에 일탈과 오만으로 흐른 데 비해, 집권 초반에 이미 냉철함과 균형을 잃은 강퍅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이 완고한 기득권 세력, 특히 정치사회적 이념과 이익 다툼에서 편향된 보수 언론에 오랜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토로에는 한편 공감한다. 그러나 국민 다수의 개혁 열망에 힘입어 집권한 그가 후보 때 간판 삼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면모는 지키지 못한 채, 자신과 정부의 평판을 낮추는 언론과의 다툼에 집착하는 것은 지도자의 금도(襟度)를 벗어났다. 노 대통령은 대미 자세와 경제·노사정책에서 기회주의적 위선을 노출, 지지계층의 우려가 옳았음을 스스로 입증하고서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보수화를 칭찬한 기득권 언론이 불공정한 음해로 평판을 훼손한다고 해서, 정책과 법률적 수단까지 동원한 강경대응을 선언하는 것은 졸렬하고 이기적이다.
노 대통령은 지금 마치 씨름판에서 진짜 적수의 샅바는 잡지 않은 채, 심판의 편파성을 지레 탓하며 상투잡이를 하는 모습이다. 그는 언론이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최종 평가자이고, 그렇기에 늘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언론도 저마다 이념과 이해에 따라 편파적인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특히 공영 방송이 아닌 신문에 가치중립적 공정성을 강요하는 것은 다양한 견해와 이익을 대변하는 신문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사회적 논쟁을 약화시킨다. 대통령은 언론과의 논쟁을 부추기기에 앞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안목부터 넓혀야 한다.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진짜 적수가 무엇인가는 자명하다. 클린턴의 성공이 일러주듯이, 국정에 매진해야 할 책무는 굳이 강조할 것조차 없다. 그보다 영국 학자 리차드 세닛의 지적에 귀 기울이기를 권한다. 국민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지도자보다, 조용히 국민의 요구를 살피고 반응하는 지도자를 신뢰한다는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이 된 바탕도 국민과 비공식적이고 일상적인 신뢰 관계를 쌓은 것이다. 그의 유명한 노변정담도 강연이나 논쟁이 아니라, 국민에게서 듣는 것이었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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