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한 맛, 그것은 대중문화상품의 속살을 이해하는 하나의 코드다. 지구촌의 대중문화 관련 산업을 '주무르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관련 창작물에서는 하나같이 성적 매력이 물씬 배어난다. 성인용이건 미성년자용이건 표현의 강도와 버라이어티에서 차이가 날 뿐, 그 섹시한 속성은 하나같이 작품 속에 촘촘히 박혀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어린이 만화에서도 섹시한 요소는 흥행과 직결될 만큼 중요하다.우리 만화사에서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섹시 작가'로는 배금택(54)을 꼽는다. 걸쭉한 입담과 그림체의 성인만화는 물론 청소년용 만화에서도 그 매력을 한껏 드러낸 작품을 잇달아 내놓았다.
1989년부터 93년까지 소년만화잡지에 연재된 이 만화는 기존의 어린이만화가 업보처럼 달고 다녔던 '순둥이'기질을 버리면서 단번에 청소년들의 시선을 끌었다. 막 사춘기가 시작되는 미묘한 시기의 소녀들이 겪는 여러 에피소드에다 그 나이에 맞는 수준의 '섹시한 요소'를 갖은 양념으로 버무렸기 때문이었다.
영심이는 한 가닥으로 위로 올려 묶은 머리, 동그란 얼굴과 그 얼굴만큼이나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가진 열 네 살 소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또래의 남친 왕경태가 등장한다. 경태는 보잘 것 없는 외모에다 커다란 졸보기를 쓰고 어눌한 말투로 웅얼거린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으로 영심이를 짝사랑한다. 이런 경태를 영심이는 언제나 박대한다. 그런데도 어쩌다가 경태의 주변에 예쁜 여학생이라도 얼씬거리면 질투로 손톱을 세운다. 여기에 영심이보다 더욱 영악한 여동생 '순심이'가 등장, 만화의 재미를 더해준다.
만화 '열네살 영심이'의 에피소드 하나. 주인공 영심이가 초경(初經)을 맞아 당황하는 모습이 소개된다.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이제 우리 영심이가 어른이 됐네"라고 기뻐하며 축하해주자 영심이의 태도는 슬슬 달라지기 시작한다. 남자친구에게도 은근히 이를 자랑하면서 "넌 아직 어린애야…"라는 식으로 대하는가 하면, 선생님에까지도 그 사실을 암시하면서 "지금부터 더 이상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통고한다. 물론 선생님은 대경실색한다.
'영심이'가 커다란 인기를 끈 요인은 '내용의 차별성'과 함께 세련된 감각의 그림도 한몫 거들었다. 소녀 만화 캐릭터라면 대개가 순진가련형 얼굴이었던 통념을 깨고 요즘 소녀들의 발랄하고 '깍쟁이'같은 이미지를 제대로 살려낸 것이다. 때문에 이 만화는 이미지요소가 강해야 하는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배금택은 서울대 생물학과를 중퇴하고 67년 '미스 도돔바'로 데뷔했다. 그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91년 이후 스포츠신문에 잇달아 발표했던 '변금련뎐' '여고생과 대학3년생' '종마부인' 등 일련의 성인만화를 통해서였다. 어딘지 모를 퇴폐적 분위기와 함께 성 문제를 발랄한 현대적 시각에서 만화화한 역량이 돋보인 때문이다. 이런 명성으로 말미암아 툭하면 관변단체로부터 '음란작가'로 지목되는 등 많은 정신적 피해를 맛보기도 했다. 배금택은 90년대 우리 만화계의 '건강한 섹시만화'를 이끈 역량 있는 선구자였다.
/손상익·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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