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 젖가슴이 오뉴월 풋감 만해질 즈음부터 옛 어머니들은 조바심을 냈다. 밭일 짬짬이 고치 삶고 물레 자아서 명주실을 챙기고, 쟁여진 실 타래가 다락방에 그들먹해지면 베틀을 탔다. 이른 저녁밥 먹고 밤새 북과 씨름해야 간신히 한 마 소출. 시집가는 누이 비단 치마저고리 한 벌 챙겨 보내려고 어머니들은 그렇게 몇 날 밤 몇 달 밤을 지샜고, 시집간 누이는 옷장 깊숙이 그 옷을 넣어두었다가 시집살이가 맵고 서러울 때마다 꺼내 들고 애꿎은 손때만 묻히곤 했다. 목화 솜 속을 댄 무명옷 한 벌이 아까워 누더기로 엄동을 나던 가난한 누이들에게 그 옷은 의복이 아니라, 부적이고 신앙이었다. '비단 옷 한 벌 사면 사촌까지 따뜻했던' 그 시절은, 뽕나무 심어 누에 기르는 잠업이 흥성했던 지리산 남쪽 함양 산청 거창 진양의 오래된 어른들에겐 아직 전설이 아니라 추억으로 남아 있다.비단자락을 끝내 놓지 못하는 사연들
진주는 그런 마을들을 아우르는 서부 경남 거점도시다. 고대 가야와 신라의 귀한 이들이 몸을 치장하던 게 진주 비단이었고, 지금도 국내 생산시설의 65%, 내수 물량의 약 80%가 여기서 난다. 그래서 진주는, 누가 알아주든 않든, 이태리 코모 중국 항주 등과 함께 세계 5대 실크도시에 든다. 'T'자 돌림 첨단의 신봉자들이 섬유산업을 일러 사양 산업이니 한계 산업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진주가 비단산업을 이어 온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한복의 옷감을 수입해서야 되겠습니까. 비단은 우리의 얼입니다." 실크공학 전문가인 한국견직연구원 권순정 연구사업본부장은 뜬금 없이 민족의 '에스프리'를 들이대며 말 문을 열었다. "한계산업이요? 모르는 소립니다. 자동차산업보다 부가가치가 높고, 바이오산업보다 성장잠재력이 큰 산업이 실크산업 입니다." 전공분야의 논리로 접어든 그의 열변은 장시간 이어졌고, 진주 상평공단에 밀집한 130여 개의 크고 작은 실크업체와 시, 연구기관 학교들은 실크산업이 얼마나 젊고 싱싱한 것인지 보여주겠다는 열의에 젖어 있었다.
시절이 어려워진 건 맞지만
진주 실크의 열의는 위기와 시련의 한 가운데에 있어서 오히려 든든하다. 흥부가 박에서 나온 흑공단을 걸치고 중중모리로 불러 제꼈던 비단타령의 그 때까지 거슬러갈 일도 아니다. 가까이 10년 전과 비교해도 지금의 실크는 현저히 남루해진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진주 실크는 돈 한 푼 없이도 뒷짐지고 사업하던 시절이었던 모양이다. "이듬해 설 대목물량 챙길라꼬 서울 부산 대구 할 거 없이 전국의 한복 상인들이 추석 때부터 선금을 질러줬다 아이가." 경남직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이기도 한 진주직물 대표 이안생씨는 막상 설 물량을 챙겨가고 나도 선수금이 남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던 것이 값싼 중국 원사와 비단이 수입되고 고속직조기가 도입되면서 판도가 변했다. 이씨는 "90년대 중·후반부터 선수금이 어음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6개월 어음이면 양반으로 쳐주게 됐다"며 혀를 찼다. 업계가 생산하는 품목이라는 것도 열에 아홉은 한복 감에 국한해 수출도 어려웠고, 어렵사리 넥타이나 스카프 원단을 짠다손 쳐도 마케팅 하랴 수출판로 확보하랴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행인 것은 그 시련에 IMF까지 겹쳐도 꺾이지 않고 버텨냈고, 오롯이 자기네 힘으로 때 맞춰 기계도 사고 디자인도 개발하면서 다품목 소량생산체제를 갖춰왔다는 것이다. 화학섬유나 면방 등과 달리 실크는 다품목 소량체제가 제격이라고 했다.
시절만 탓하며 주저앉을수야
진주 비단꾼들이 뒷짐 진 손을 풀어 앞으로 모은 것은 채 5년이 안 된다. 같은 비단으로 짠 넥타이가 2달러짜리도 되고 200달러 짜리도 된다는 것을 알게도 됐다. 그러면서 국내·외 전시회나 박람회에도 나다니기 시작했다. 그 사이 한 곳도 없던 실크 위탁판매장이 경남 도내에 10개소가 됐고, 수출업체도 1곳에서 15곳으로 늘었다. 이들 대부분을 30,40대 젊은 사장들이 경영하고 있다. 견직연구원 40여명의 디자인·염색 전문가들이 새로운 날염·선염 디자인을 고안해 수시로 샘플을 제공하고, 다양한 시제품 개발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명주실과 면사 모 레이온 등을 섞는 교직기술도 개발, 보급하고 있다. 이들 교직 제품은 원단가격을 낮추고 제품을 다양화·대중화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임지영(33) 연구원은 "스카프 넥타이 시장을 넘어 실크 패션과 홈인테리어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고어텍스로 넥타이를 만들 수 없듯이 이미 실크 고유의 영역이 있고, 그 영역은 개척되지 않은 불모의 영역으로 무한정하다는 게 이들의 신념이고 열정의 근거다. 13개 중견업체가 모여 '실키안'이라는 브랜드의 공동 판매법인을 설립 운영한다고 나서자 시에서는 진주성 앞 목 좋은 곳에다 100평 남짓 면적의 제품 상설전시·판매공간도 제공했다. 지난해부터 실크축제(10월)도 열어 패션쇼와 디자인전 천연염색전 등 행사도 벌이고 있고, 올해부터는 그 행사를 패션전문 케이블방송사와 공동주최 할 계획도 세워두고 있었다.
진주실크는 아직도 젊다
지난 달 30일. 1주일의 방학이 시작됐지만 연구원 별관 2층 강의실에는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요상한 디자인들이 떠 있는 모니터와 한창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대학을 마치고 섬유디자인 6개월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모인 100명의 수강생들 가운데 일부. 경상대에서 도시설계를 전공한 김해성(30)씨도 그 틈에 있었다. "사람 사는 도시 전체를 비단으로 휘감아 덮을 자신이 있습니다." 오래된 도시 진주의, 그 도시의 명(命)보다 길고 오래된 산업이 새 피를 흘려 받는 모습이 든든해 보였다. 그들의 투신이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기 이전에 성공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열 마디 말보다, 시와 연구원이 구상하는 열 가지 계획과 구상보다 믿음직한 진주 실크산업의 미래일 지 모른다.
/진주=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275억 들여 "실크밸리" 야심
추세를 거슬러 간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한동안 내리막길만 있어 온 진주 실크산업에 새로운 추세를 만드는 일은 지자체나 공단의 역량만으로는 버겁다. 그래서 업계는 최근 시와 연구원이 마련한 '실크밸리' 조성사업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실크밸리는 산학연 인프라를 포도송이처럼 엮고, 거기다 진주 실크의 문화를 상품화할 수 있는 실크역사관과 상설 패션쇼장, 전시·판매장, 바이어 상담장 등을 갖추자는 것. 그래서 관광객에게나 해외 바이어들에게 가야 철기시대 이래 진주의 오랜 실크문화를 경험하게 하자는 구상이다. 시는 이미 시 외곽에 4만5,000여 평의 부지도 선정했다. 정부 승인이 나면 275억원이 드는 이 사업(04∼06년)에 70여 억원의 민자를, 약 100억원의 시·도예산을 들일 계산이다.
대진고속도로가 뚫리고 창선―삼천포대교가 서면서 관광객도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고, 30분 거리의 사천시에는 외국인전용공단도 섰다. 그것들이 모두 진주 실크산업이 부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으로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두고 보소. 될 낍니더. 우리가 할 낍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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