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나는 칼럼니스트로서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을 비판하는 것에 회의를 품게 됐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적합한 언행에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해봤다. 비판에 대한 그의 반응을 보며 비판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그래서 나는 한동안 대통령의 언행에 대해 침묵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칼럼니스트의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의 침묵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노 대통령이 임기를 채울지 의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회 원로들도 그런 말을 했고, 여당 중진도 했고, 택시 기사들도 하고 있다. 야당 대표는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했다. 대통령으로서는 그 이상의 수모가 있을 수 없고, 그를 선출한 유권자들에게도 모욕적인 말이다.
대통령이 집권 몇 달 만에 그런 말을 듣는다면 참기 힘들 것이다. 화가 나고 야속하고 두렵고 초조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특강까지 하면서 국면을 전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성공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말할 때마다 그가 핵심을 피하거나 잘 모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대다수 국민이 생각하는 핵심과 대통령이 생각하는 핵심 사이에 거리가 있고, 그로 인해 불신과 회의가 더 깊어지고 있다.
최근의 예만 보더라도 그렇다. 굿모닝시티 사건으로 불거진 정치자금 문제나 양길승 청와대 부속실장의 향응 파문에 대한 대통령의 대응은 국민의 생각과 거리가 있었다. 대통령은 사건의 핵심을 외면한 채 언론의 과잉보도나 누군가의 음모에 대해서만 결연한 투쟁의지를 보였다. 굿모닝시티 사건에서는 그 돈이 한푼이라도 대선자금으로 쓰였다면 죄송하다는 유감표시와 함께 정치자금의 폐단을 줄일 수 있도록 법 개정 등 제도 개선을 서두르겠다는 의지를 보였어야 한다. 그러나 대선자금 액수에 대한 여당 인사들의 거짓말이 꼬리를 물고 뒤얽히면서 대선자금 공개 압력이 거세졌고, 제도 개선은 뒷전으로 밀리게 됐다.
여당이 먼저 대선자금을 공개했지만 거짓말이 거듭된 후라 믿는 사람이 없었다. 대선자금에 관한 한 한나라당이 더 규모가 클 것이라는 계산으로 한나라당을 물고 들어가려던 전략도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정치자금 문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과거에 대한 공방으로 이어지다가 행방불명 됐다. '고해성사'를 주장하던 대통령은 정직함도 개혁의지도 보여주지 못했다.
양길승 부속실장의 향응파문에서도 벌써 핵심을 놓친 조짐이 보인다. 양 실장의 행적을 몰래 찍은 비디오가 방송국으로 배달된 것을 보면 누군가의 음모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누가 어떤 음모를 꾸몄던 간에 지금 확실한 것은 양 실장이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했고, 이 정부가 최근에 만든 공무원 윤리강령을 어겼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번 사건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언급했지만, 음해세력이나 언론의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언론이 과잉보도를 하고 있다는 불만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언론이 이 사건을 조작하거나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이상 언론을 비난하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또 음모의 주체가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특정세력의 음모'로 예상하여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도 적절치 못하다.
국정토론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하고 토론도 할 수 있지만, 비생산적인 시간이 돼서는 안 된다. TV로 국정토론 중계를 보았는데, 과연 저 정도의 토론을 위해 대통령과 장관들이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참석자들의 얼굴에서도 그런 피곤함이 드러났다.
지금 대통령에겐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 속에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초조하게 국면전환을 꾀하지 말고 묵묵히 죽을 힘을 다해 일하다 보면 국민과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절대로 중간에 하야 안 합니다"라고 되받아치는 민망한 장면을 국민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분해도 참아야 한다.
경제 교육 북핵 등 산적한 국정과제들에 파묻혀 말할 시간도 없이 땀 흘리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노 대통령의 가장 큰 적은 음해세력이 아니라 자신의 다변과 궤변이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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