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난쟁이' 시민사회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하나는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아닐까. 원래 사물의 외적 경관을 가리키는 이 개념이 인간적, 감동적 내면현상을 가르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된 것은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의 마지막 구절에서부터였을까.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얼마 전부터 공중화장실은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는 표어를, 어느 항공회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선전문구를 쓰고 있다. 또 최근 '아름다운 재단'이 나와 '아름다운 기부'운동을 벌이며 '아름다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모 역무원이 어린아이를 구하는 대신에 자신의 두 다리를 잃는 일이 벌어졌을 때, 매스컴은 앞을 다투어 '아름다운 역무원'이라고 표현했다. '아름다운 희생' '아름다운 퇴장' '아름다운 선택' '아름다운 장학금'….
한국사회는 갈등과 불안 속에서도 구석구석 아름다움이 넘쳐가고 있다. 이 아름다움을 더욱 심화·확대하는 길로 가다 보면 우리가 '아름다운 선진국'이 되지 않을까.
나는 '국민소득 2만 달러' 대신 차라리 '아름다운 선진국'을 국민적 비전으로 내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2만 달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개발독재시대의 유물같은 인상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더욱 효율적이기까지 하지 않는가. 세계는 지금 국가간 품격경쟁의 시대이다. 이런 품격경쟁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다.
지금은 아름다움이 경쟁력의 원천이다. 경쟁력의 원천은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에서 점차 경박단소(輕薄短小) 산업으로,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그리고 다시 패션·디자인·브랜드로, 그리고 다시 신뢰성·투명성·품격성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 뒤쪽으로 가면 갈수록 바로 아름다움이 보다 크게 지배하는 영역이다. 중세가 선을 추구하는 시대였다면 근대는 이성을 추구하는 시대였고, 탈근대의 21세기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그래서 우리가 앞장서 아름다운 선진국이 되자는 것이다.
현재의 선진국들은 거의가 제국주의 방식으로 선진국이 된 나라들이다. 그러한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희생물이었던 한국의 세계사적 사명은 비제국주의적 발전의 모델을 증명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선진국들은 거의가 군비확장, 무기판매로 부자가 된 나라들이다. 그러한 군비확장의 전형적인 희생물이 되었던 한국은 군비축소, 평화확대로 선진국이 되는 모델국가가 되어야 할 세계사적 사명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선진국은 공해를 수출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제품수출로 선진국이 된 나라이다. 그러한 공해수출의 희생물이 된 한국은 세계의 공해를 추방하는 제품을 만들고 공급하여 선진국이 되는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세계의 중심―주변 구도 속에 한국은 늘상 주변국가로 내몰려 왔다는 쓰라린 경험 위에서 한국은 또 하나의 중심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따로 없는 세계를 실현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나는 한국이 개도국으로서 선진국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아온 상처를 스스로 어루만지고, 현 정부는 후발국의 추격을 경계하는 말 대신 상생적 선진화의 길을 추구하기를 기대한다. 나는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한국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유학생들, 그리고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천상병의 시처럼 '귀국하여 한국사회는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말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선진국의 건설을 각자의 비전으로 받아들여 각자가 있는 곳에서부터 아름다운 선진국의 건설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흥부전을 재해석하며 흥부나라 만들기 운동을 벌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 영 호 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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