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TV 오락프로나 드라마가 일본 것을 모방했다는 시비가 종종 있지만, 우리나라가 도저히 베낄 수 없는 방송 프로가 한가지 있다. 바로 NHK가 2년전부터 매주 방영하고 있는 '프로젝트 X'. 로봇 강아지, 세계에서 가장 큰 유조선, 지하철역 자동개찰기 등 일본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술의 탄생 과정을 재구성한 프로이다. 2차대전 직후 잿더미 속에서 일본이 어떻게 경제대국으로 변신할 수 있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인 셈이다.일본인들의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도쿄에서 가장 큰 양판점중 하나인 긴자(銀座) 'BIC 카메라'의 한 판매직원은 "삼성 LG 제품이 싸긴 하지만, 그래도 손님들은 소니, 샤프를 주로 찾는다"며 "기술에 관한 한 일본이 최고라는 확신 때문"이라고 말했다. 샤프와 비교하면 초박막액정화면(LCD) 모니터는 삼성이 2만엔(20만원), 컴퓨터 모니터는 LG가 4만엔씩 더 싸다.
이렇듯 10년 경제불황에도 불구, 일본이 경제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비결은 바로 세계 최강의 기술력을 보유한 제조업의 힘이다. 일본은 1990년대 중반이후 거의 매년 1,000억달러 이상의 경상수지 흑자기조를 유지해오고 있다. 일본 정부가 적자수렁에 빠져 있어도, 국채를 계속 인수해줄 수 있는 기업들이 있기 때문에 일본은 버티는 것이다.
와세다대 상학부 이홍무(李洪茂) 교수는 "일본의 국내경제 지표만 보고 더 이상 일본에게서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단견"이라며 "정보기술(IT)만 해도 게임이나 정부 정보화와 같은 일부 소프트웨어는 한국이 나을지 몰라도, 하드웨어나 인프라에서는 한국이 아직 멀었다"고 못박았다. 일본의 국가경쟁력은 세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났지만 기업의 연구개발(R&D)과 독창력은 여전히 세계 2,3위이다. 일본의 미국 특허건수도 미국에 이어 부동의 2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제조업의 힘을 기술력의 결과라고만 본다면, 이는 오산이다.
일본 제조업의 '성공한 10년' 뒤에는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을 넘어, '메이드 바이 도요타(made by Toyota)'로 대표되는 글로벌 전략이 숨어있다. "세계인구가 60억명인데, 자동차는 7억대밖에 없지 않습니까." 도요타의 키타가와 테츠오(北川哲夫) 해외홍보부장은 "일본 경제가 안 좋아지기 시작한 90년대 초반부터 우리는 글로벌화에 매진했고, 이것이 적중했다"고 설명했다.
도요타는 지난해 국내 판매가 2% 감소했지만, 해외판매가 8% 급증하면서 일본기업 사상 최대 순이익(1조엔)을 기록했다. 일본 국내에서의 자동차 생산대수는 90년 421만대에서 지난해 349만대로 줄었지만, 해외공장 생산은 68만대에서 지난해 215만대로 늘었다. 글로벌화에 성공한 기업은 국내경제가 불안해도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일본은 대기업의 공장 해외이전과 이에 따른 국내 산업공동화 문제에 대해서도 대단히 관대하다. "70, 80년대 일본 가전이 미국을 점령했지만, 이기간 미국은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로 대표되는 새로운 비즈니스를 키웠지 않습니까." 도쿄대 이토 모토시게(伊藤元重) 경제학부 교수는 "산업공동화는 경제가 성숙해지면서, 어느 나라건 다 경험하는 것"이라며 "자국의 임금수준이 높아지면 해외로 나갈 기업은 나가고, 대신 더 부가가치가 높은 신산업을 국내에 만들면 된다"고 말했다.
더 이상 일본기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글로벌화한 소니도 마찬가지다. 소니의 전체 영업이익중 해외 판매의 기여분은 이미 70%에 달한다. 소니사의 사카구치 메구미(坂口惠) 홍보부장은 "인건비가 싼 데로 가서, 수익을 높이는 것은 당연하다"며 "국내 생산비중을 50% 이내로 점차 줄이고, 장기적으로는 일본내 생산기지를 엔지니어링 센터로 재편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해외로 공장을 옮기겠다'는 논리로 정부를 '협박'하는 한국 대기업이나, 외자유치를 통한 국내산업의 고부가가치화에 미적대는 한국 정부 모두에게, 일본은 여전히 배울게 있는 셈이다.
/도쿄=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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