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각종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음모론은 한가지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는데, 그건 이야기의 형식으로 유통된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힘은 막강하다. 요즘 아이들이야 불행하게도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거의 못듣고 자라겠지만,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자란 세대는 이야기의 가공할(?) 마력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이야기는 6하 원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럴 듯하면 그걸로 족하고 설득력은 말하는 이의 권위와 말솜씨에 좌우된다. 굳이 옛날 이야기를 상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그거 말 되는데'라거나 '말도 안돼'라는 말을 즐겨 한다. 진실은 때로 얼른 듣기엔 말도 안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진실은 이야기로서의 생명력이 약하다.
역사적으로 선전의 대가들은 '진실'보다는 '그럴 듯한가'에 더 큰 무게를 둬왔다. 예컨대, 1942년 연합군의 몽고메리 장군이 북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 독일은 '무적의 롬멜 장군'이 그곳에 없었다는 사실을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밝히면 사람들은 독일이 패배를 변명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일 것이니 그 사실을 밝힐 필요가 없다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미국의 미디어 비평가 데이비드 솅크가 쓴 <데이터 스모그> 라는 책은 그럴 듯하게 들리는 걸 목적으로 삼는 '이야기 정보'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 책에 인용된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의 말을 들어보자. 데이터>
"우리는 이야기 정보의 사용에 익숙하다. 그것은 우리가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의 문화들 속에서 이것 저것들을 배워온 방식이었다. 통계와 논리적 논증에 의해 세계에 관해 배우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저널리즘은 그 탄생 이후로 지금까지 '이야기 정보'의 유혹과 싸움을 벌여왔다. 신문을 많이 파는 데엔 이야기 형식으로 기사를 쓰는 게 유리했지만, 그건 진실 및 사실 추구를 목적으로 삼는 저널리즘의 본령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엔 고급지는 이야기 정보를 가급적 피하는 반면 대중지는 모든 기사의 '이야기 정보화'를 추구하는 식으로 저널리즘의 이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 신문들은 고급지와 대중지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발행부수가 많다고 주장하는 신문일수록 정치 기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쓰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럴 듯하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써 제끼는데다 대서특필도 불사하는 바람에 당사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오보 및 왜곡·과장 보도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최근 어느 신문이 저지른 대형 오보 사건도 달리 이해할 길이 없다. 기사로서의 최소 요건도 갖추지 못한 이야기를 1면 머릿기사로 보도할 수 있었던 건 일부 유력지들이 얼마나 '이야기 정보'에 중독돼 있는가를 웅변해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의 정치 보도가 이야기의 상업적 가치에 탐닉해 '음모론'이나 양산해내고 정치 퍼스낼리티의 대결 구도에 몰두하는 한 정치개혁은 영영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 기사가 '스모그'로 전락해서야 쓰겠는가.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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