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지음 돌베개 발행·1만8,000원400여 년 전 조선 선비를 오늘의 서울에 초대해 대화를 나눈다면 무척 재미있겠다. 상전벽해의 세월을 건너 온 선비는 너무나 달라진 세상에 깜짝 놀랄 것이고, 그를 초대한 사람은 옛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묻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터이다.
우리나라 미시사 연구의 개척자로 꼽히는 백승종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쓴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는 16세기 조선 철학자 하서 김인후(1510∼1560)와 나눈 가상 대화의 형식을 빌어 당시 조선 선비의 일상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책은 하서의 개인 문집과 그가 남긴 1,600여 편의 한시를 자료 삼아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하서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쌍벽으로 꼽히는 인물이자 그 시대의 대표적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30대 초반 3∼4년 관직에 몸을 담았으나 자신이 충성을 다 했던 임금 인종이 독살되고, 잇따른 사화에 절친한 벗들이 희생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전남 장성으로 내려가 은거하면서 성리학 공부로 말년을 보냈다.
백 교수는 하서에게 꼬치꼬치 묻는다. 집안을 소개해 달라, 취미는 뭐였냐, 아내 자식 친구들 얘기를 해달라, 당신은 열네 살에 결혼했는데 너무 빠른 거 아니냐, 그때는 다 그랬냐, 벼슬에 미련이 없었냐, 낙향해서는 어떻게 지냈느냐, 당시 선비들은 어떤 공부를 하고 과거 준비는 어떻게 했냐, 당신이 주창한 사상의 요체는 무엇이냐…. 가끔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당신은 수많은 시를 썼지만 연애시는 하나도 없던데 너무 금욕적인 게 아니냐, 당신은 남성우월주의자 같다….
하서는 자세히 답한다. 내가 살던 시절에는 이러이러했다고 설명하면서 요새는 어떠냐고 되묻기도 한다.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때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도 하면서. 역사 서술의 새로운 글쓰기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문답식 대화를 택한 까닭은 '운동경기를 실황중계하는 듯' 생생한 현장감을 전하기 위해서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16세기 조선 사회의 중층성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리학은 비교적 낯선 첨단 학문이어서, 선비들도 성리학에만 매달리지 않고 불교나 도교적 취향을 지니는 등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대 배경이 투영된 결과, 하서의 인간적 풍모 또한 다원적 복합성을 띤다고 분석한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로 하서가 도교와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면서도 신선이 되는 장생술을 공부하는가 하면 스님들과 교유하기도 한 사실을 들면서, 하서가 살던 때는 재래의 관습이 여전히 남아있는 한편 성리학적 질서로 넘어가는 변화의 새 바람이 불던 과도기라고 진단한다.
지은이는 하서에게 인간적 매력을 느낀 모양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오가는 듯한 이 별난 심층 인터뷰를 마치는 글에서 그는 "하서는 푸근하고 정감 넘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400여 쪽에 걸친 이 책 곳곳에서 가족을 사랑하고, 우정을 소중히 하며, 시와 술을 지나칠 만큼 즐기고, 꽃을 키우고 정원을 가꾸는 데 몰두하며, 시종 반듯한 몸가짐으로 성리학적 윤리를 실천한 하서의 풍모를 더듬고 있다.
봄이면 꽃을 꺾어 모자에 꽂은 채 답청 놀이를 하고, 소슬바람 부는 가을이면 벗들과 시짓기 모임으로 즐기던 선비의 풍류가 보이는가 하면, 과거 준비하러 들어간 절간에서 그곳에 모인 선비들과 귀신 얘기로 밤새 수다를 떨던, 요새 젊은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장면도 등장한다.
조선 선비의 생활사를 다룬 책은 올 들어 정창권의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사계절) 허경진의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푸른역사) 이 나왔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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