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東京) 번화가에는 휴대용 휴지를 나눠주는 젊은 여성들이 서울보다 훨씬 많다. 유흥업소 선전용이려니 하고 받아보면, 열의 아홉은 휴지 뒷면에 대금업체의 돈 빌려 쓰라는 전단이 끼어있다.부실기업에 물린 은행들이 개인대출로 돌아서면서, 은행 빚을 못 갚은 사람들이 대금업체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일본의 개인파산자는 10년 전의 5배인 22만명. 2001년보다 30% 늘었다.
서울 청담동처럼 명품 매장이 즐비한 오모테산도(表參道)를 활보하는 여성 10명 중 5∼6명이 루이뷔통 가방을 메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초저가 할인점 '100엔샵'이나 저가 의류매장 '유니클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 전철역에는 가족 노숙자까지 등장했고, 대형서점에는 '일본경제의 침몰' '성장경제의 종언' 등과 같은 책이 앞쪽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다. 양판점에 근무한다는 주부 야마베 게이코(28)씨는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형편이 괜찮았는데 요즘은 집 근처 슈퍼마켓 중에서도 가장 싼 곳만 찾아 다니고 가족 외식은 않는다는 원칙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 거품이 꺼지지 시작한 이후 일본 정부가 경제회복을 위해 123조엔(1,23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 부었는데도 왜 이지경이 된 걸까.
'일본경제의 덫'이라는 책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일본 경제산업성 산하 경제산업연구소 고바야시 게이치로 박사는 "디플레와 부실채권의 악순환이 반복하고 있는데도, 정부 정책은 돈만 푸는 식으로만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함께 살고 함께 죽어야 한다는 관습 때문에 죽일 기업을 확실히 퇴출 시키는 구조개혁을 못 한거죠. 결국 생존여부의 갈림길에 있던 기업들이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며 건전한 기업으로 흘러가야 할 돈줄을 막아 온 겁니다."
'홋카이도(北海道) 고속도로에는 차보다 곰이 더 많다'는 우스개소리는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 내각부 산하 경제총합연구소 우시지마 준이치로 차장은 "재정투입 과정에 낭비적인 요소가 많은데다 힘 센 정치인이 있는 지역구 순으로 돈이 들어갔기 때문에 재정정책도 반짝 효과에 그치고 말았다"고 말했다. 도쿄만을 가로질러 도쿄 남동쪽과 치바(千葉)현을 이어주는 15㎞ 해저터널 '아쿠아라인'은 1조4,400엔을 쏟아 부어 준공됐지만 5년여가 지난 지금 아직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1시간정도 시간을 절약할 수는 있지만 왕복 6,000엔씩이나 주고 다닐 일본인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가 1.4배(서구 선진국은 0.4∼0.7배)에 달하지만, 부실채권의 최대 주범인 건설업체들은 여전히 정치권과 튼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결국 정부와 정치권의 무능력·무소신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구조개혁을 하면 반드시 손해 보는 사람이 나올 수 밖에 없는데 건설업계와 중소기업 등을 기반으로 하는 자민당이 개혁에 극구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90년 이후 9명의 총리가 교체되면서, 구조개혁을 선도할 정치적 리더십도 없었고, 부처간 영역다툼과 낙하산 인사관행으로 정부의 감독기능도 마비됐다. 92년 2금융권 부실이 표면화했을 때 당시 미야자와 총리는 인기를 의식, 공적자금 투입방침을 철회했다. 하지만 그 때 공적자금을 투입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낙관적이다. 고테가와 다이스케 재무성 대신관방심의관은 "지난해 10월 '종합 디플레 대책'에 따라 부실채권 정리가 일단락돼 올해와 내년이 긴 불황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고바야시 게이치로 박사의 견해는 다르다.
"아직 숨어있는 부실채권이 엄청나 일본경제가 갑작스럽게 붕괴하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회복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개혁의 고통 없이 국민세금만 휴지처럼 써버린 지난 10년이 아직도 멍에가 되고 있다는 얘기다.
/도쿄=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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