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물은 이제 시대의 아이콘이다7월25일 강남구 청담동에 문을 연 '퓨어 요가'라는 요가 클럽에서는 땀을 많이 흘려 목이 타는 고객을 위해 물을 판매한다. 그러나 진열장에 구비된 물은 단 두 종류, '에비앙(Evian)'과 얼마전 우리나라에 수입되기 시작한 프랑스 고가 미네랄워터 '콘트렉스(Contrex)' 뿐이다. 국산물은 찾아볼 수 없다.
'퓨어 요가' 강태규 실장은 이 두가지 물만 판매하는 것에 분명한 의도가 실려있다고 말한다. "우리 요가 클럽은 고급스럽고 럭셔리한 이미지를 추구합니다. 이 물들이 각종 미네랄을 공급해 몸의 균형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보다 클럽 전체의 분위기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진열장에 싸구려 물이 놓여있다면, 어울리겠어요?"
'화학적으로는 산소와 수소의 결합물이며, 천연으로는 도처에 바닷물·강물·지하수·우물물·빗물·온천수·수증기·눈·얼음 등으로 존재한다.'
'물'에 대한 백과사전의 정의는 이처럼 지루하게 시작한다. 하지만 과연 물은 단지 물일 뿐일까?
최인호의 상도에서 임상옥은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고 했지만 물은 평등의 척도로 사용될 자격을 갖추고 있을까? 석유전쟁의 검은 연기에 가려있기는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물 때문에 수천년간 전쟁을 치루고 있는 나라가 많다는데도?
2003년 한국에서 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 물이 있는 풍경을 찾아 물이 갖는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들춰봤다.
② 물은 이제 이미지다
멋지게 차려 입고 카메라를 섹시하게 응시하는 패션 모델. 그녀의 패션을 완성하는 것은 두시간 들여 완성한 머리도, 명품 액세서리도 아닌 '에비앙' 물병이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미네랄 생수를 통해 이 사진은 고급스럽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완성한다. 3년차 회사원 김지혜(26)씨의 집에는 에비앙 물병이 사이즈별로, 정확히 일곱개 구비돼 있다. 모두 빈 물병이다. 그날그날의 패션에 따라 김씨는 물병에 정수기물을 채워 손에 들고 외출한다.
"물을 많이 마셔야 건강에 좋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 여자들은 물병을 들고 다니며 수시로 마셔요. 큰 돈 들여 명품 가방 사서 맸으니 에비앙 물병으로 '나는 먹는 물까지 럭셔리하다'는 이미지를 확실히 주고 싶은 겁니다." 그 안에 정수기물을 채우는 이유에 대해서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에비앙, 비싸잖아요. 솔직히 맛도 익숙하지 않고…"라고 답한다. 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인라인족에게도 패션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최신형 인라인 스케이트에 '오클리(Oakley)' 가방과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가방에는 으레 물 한 병을 꽂는다.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정희찬(30)씨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러 한강에 나갈 때마다 편의점에 들러 '에비앙', 혹은 '순수'를 구입해 가방에 '장착'한다고 말한다.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특별히 미네랄 생수를 먹냐고 묻는 친구가 있더군요. 솔직히 그런 걸 제가 알겠습니까? 전체 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것 같으니깐 사게 되는 거죠. 사각 물병에 흰 띠 둘러진 물통보다는 어때요, 보기 좋지 않아요?"
③ 물은 이제 부의 척도다
언제부터인가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어느 정도 사세요?"라는 뜻을 내포하게 됐다. 이제 곧 "무슨 물 먹어요?"라는 것도 같은 뜻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선진국을 구별하는 척도에는 여러 지수와 성향이 있다. 국민소득 1만 달러가 넘으면 사람들은 물을 선별해서 마시기 시작한다는 한 연구결과는 국민들이 물을 마시는 성향이 한 국가의 수준을 정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고가의 수입생수가 소위 '잘사는 동네'를 중심으로 팔리고 있다는 것이 이를 시사한다.
LG25시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생수 종류는 제주 삼다수, 퓨리스, 광천수, 스파클, 에비앙 등 총 다섯 가지. 이중 다른 생수의 두 배 가격인 에비앙은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 매장에서 하루 평균 9.6개가 판매돼 전체 생수 판매량(67.3개)의 14.6%를 차지한다.
서울 시내 전체의 에비앙 판매율인 4.7%의 세 배가 넘는 수치다. 1.5ℓ 12병에 2만3,000원 하는 에비앙을 배달시켜먹는 가정의 92.1%는 서울·경기지역에 몰려 있고 서울 중에서도 강남구와 서초구가 35.0%를 소비한다.
④ 물은 이제 고급마케팅 도구다
회사원 윤헌정(30)씨는 얼마 전 강남구 신사동의 고깃집 '마나'를 찾았다가 독특한 경험을 했다. '고깃집에서는 쓰던 페트병에 정수기물을 담아준다'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지만 이 음식점에서는 강원도 홍천에서 특별히 공수한 '약산샘물'을 주면서 마치 와인을 따듯 손님이 보는 앞에서 열어준 것.
"뿐만 아니라 테이블에는 '마나는 위생을 위해서 정수기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이 물이 기름을 녹이고 해독작용까지 한다고 써 있더라구요. '역시 후진 고깃집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에 특별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어요."
얼마 전까지 고급 카페나 레스토랑에서는 투명한 유리병에 레몬을 띄워주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청담동 일대의 까페에서는 유리병에 담긴 에비앙이나 페리어(Perrier)가 서빙되기 시작했다. 에비앙 마케팅실 박은정 차장은 "최근 파티 문화가 확산되면서 하얏트, 워커힐 등 특급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에 '에비앙'을 구비해 놓는 것이 트렌드가 됐다"며 "주최측은 이 파티가 고급스럽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고 우리도 소구하는 타겟층에 우리 제품을 노출시킬 수 있는 '윈-윈' 마케팅"이라고 말했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