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포로 87명과 함께 2만4,500톤급의 수송선 아스토리아호에 몸을 실었을 때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것 같은 비감한 심정에 한없이 슬펐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 조국에 보답하자는 각오를 다졌습니다."한국전쟁 당시 포로가 됐다가 종전 후 제3국행을 선택,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삶의 궤적을 그렸던 현동화(71) 인도한인회장. 그는 그러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광장'의 주인공과 달리 정착지인 인도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했다.
현 회장은 자신의 삶이 소설의 줄거리와 대체로 비슷하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다른 부분이 많다고 말한다. 인민군 중위로 참전한 전쟁에서 그는 두 차례의 폭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자진 귀순해 포로가 된다. 죽고 죽이는 사상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포로수용소에서 제3국을 선택한 것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귀순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있는 북한으로 갈 수도 없고 혈혈단신 남한에 남는 것도 자신이 없어 공부나 더 하자는 생각으로 미국행이 가능한 제3국을 택했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4년 인도에 정착한 그는 함께 인도에 닻을 내린 4명의 동료와 함께 양계사업을 시작했다. 인도정부에서 빌린 4,000달러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양계장을 만들어 닭 5,000∼6,000마리와 돼지 30∼40마리를 길렀는데 5∼6년 후에는 빚을 모두 갚을 정도로 잘 됐다.
현 회장은 한국 총영사관에서 잠시 일하면서 한·인도 교류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이후 가발사업에 뛰어들고 여행업도 벌이는 등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사업영역을 의욕적으로 넓히다 보니 결혼도 늦었다. 그는 1969년 처음으로 귀국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 길로 중매결혼을 하게 되는데, 당시 서른일곱의 나이였다.
70, 80년 개발연대에는 무역으로써 조국에 적잖은 보답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국산 직기를 아프가니스탄에 수출해 카불섬유라는 회사를 설립했던 일.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수교의 길이 열렸다.
일제 강점기의 학창시절, 해방공간에 불어 닥친 공산주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한국전쟁, 전쟁의 연장인 포로수용소, 혈혈단신으로 정착한 인도생활 등 그의 인생에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인생역정을 품고 살아온 그는 최근 발간한 자서전 '격랑의 세월 인도에 닻을 내리고'(나무와 숲)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반공포로답게 "통일은 자유주의 깃발아래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통일이 되면 총석정과 백사장이 아름다운 고향 고저(강원도 통천군)에서 살고싶다"고 소원했다.
/글=김정곤기자 kimjk@hk.co.kr
사진=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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