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내 농협축산물공판장(도축장). 도축된 고기를 싣기 위해 들고 나는 수십 대의 냉장탑차들로 입구부터 붐볐다. 한 켠엔 도축 때 나온 폐기물이 담긴 부대자루가 수북이 쌓여있고, 굴삭기에 집혀 옮겨지는 자루에선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바람이 불면 고기 비린내는 농수산물도매시장의 야채 썩는 냄새와 섞여 더욱 고약해졌다. 그런데도 서울시가 도심부적격시설인 가락시장내 도축장 폐쇄 시한을 일방적으로 연기해 논란이 일고 있다. 시가 주민 민원에 따라 올해 3월31일까지 폐쇄토록 농협에 통보했으나 시한을 4개월 넘긴 현재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시는 "부천시로 이전하려는 농협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 폐쇄 연기가 불가피하다"며 농협을 두둔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시가 피해 주민들의 의견 한번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폐쇄를 연기했다"며 대규모 집회 등 실력행사에 나설 태세를 보이고 있다.오래 전부터 민원 제기
1986년에 설립돼 2001년 1월까지 하루평균 4,300여 마리의 소와 돼지를 도축해 서울시민 육류소비량의 65%를 공급해 온 가락시장 도축장은 지금도 하루에 소 250마리, 돼지 2,500마리를 도축해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냄새와 쓰레기 등 환경문제는 물론이고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와 마주보고 있어 교육 차원에서도 이전은 주민들의 오랜 민원이었다.
문정동 주민 방모(38·여)씨는 "가원초등학교 6학년인 딸이 '냄새 때문에 점심을 못 먹겠다'는 말을 한다"며 "소, 돼지를 죽이는 도축장이 학교 근처에 있는 것은 교육상으로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올림픽훼미리타운 주민 박모(49)씨는 "보통 때도 악취가 심하지만 흐린 날은 특히 더해 창문을 열어 놓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전하려면 5년은 더 걸려
주민들은 96년부터 도축장 이전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고 나섰고, 구의회도 특위를 구성, '도축장폐쇄결의안'을 채택했다. 97년 말부터 농림부, 농협과 도축장 이전 협의를 시작한 시는 2000년 3월 농협에 공문을 보내 '2003년 3월31일까지 부분육 및 브랜드육 유통을 제외한 도축 기능을 폐쇄하라'고 통보했다.
이에 따라 농협은 경기 부천시 오정구 삼정동에 있는 도축장(7,832평)의 주변 녹지 1만여 평을 추가 매입해 이전하겠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지금은 녹지를 공업용지로 바꾸기 위한 부천시의 도시기본계획 수립이 이뤄지지 않아 당장은 이전이 어렵다며 입장을 바꿨다.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더라도 도축장이 실제 이전하는 데는 앞으로 5년은 족히 더 걸릴 전망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부천시 도시기본계획이 내년도에 수립되더라도 주변 녹지의 토지 용도변경 등 도시시설계획변경과 부지매입 등을 거쳐 실제 시설을 갖추려면 최소 5년은 걸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주민들, "서울시 수수방관하더니…."
도축장 폐쇄 시한까지 약속 받았던 주민들은 폐쇄가 사실성 연기됐다는 말에 "처음 듣는 얘기"라며 "시가 폐쇄 결정을 내린 뒤 수수방관만 하더니 결국 약속도 못 지키고 주민을 우롱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낙기 송파구의회 의장은 "도축장 폐쇄는 전임 고건 시장이 행정명령을 내리고 주민과 여러 차례 약속을 한 것"이라며 "시장이 바뀌었다고 시가 더욱 나 몰라라 한다"고 말했다. 올림픽훼미리타운 입주자 대표 강장순씨는 "주민 의견 수렴 없는 폐쇄 연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제는 폐쇄할 때까지 실력행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 관계자는 "시가 주민들에게 공식적으로 폐쇄를 합의해 주거나 시한을 약속한 적은 없다"며 "농협이 계속 이전을 추진하고 있으나 부천시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기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경우기자 gw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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