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엘베 화랑에서 그림이 3점이나 팔렸다는 얘기를 듣고 몽마르트를 내려오던 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때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 집시가 사람을 모아놓고 점을 치고 있었다. 서구에도 이런 것이 있나 싶어서 신기한 마음에 그 집시에게 나도 점을 보았다. 점괘가 인상적이었다. 그 집시는 나에게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겼으니 앞으로는 탄탄대로"라고 말했다. 그 집시가 나의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내가 언론과 미술 평론가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하자 여기 저기서 내 작품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화랑과 미술관에서 나를 찾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미국의 신시내티 미술관은 내가 첫 개인전을 열었던 라라뱅시 화랑을 통해서 제5회 국제 석판화 비엔날레에 출품할 수 있는지 물어 왔고, 뉴욕의 월드하우스 갤러리는 김환기씨의 작품과 내 작품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나는 이름도 김수(Kimsou)로 바꾸었다. 엘베 화랑 사장이 "파리 화단에 알려진 우리나라 화가들 가운데 공교롭게 김환기 김종하 김세용씨 등 김씨들이 너무 많아 구별하기가 어렵고 이름도 너무 길다"며 바꾸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60년에 열린 라라뱅시 개인전에는 60점을 출품했는데 전시 중에 45점이 팔렸다. 또 전시가 끝난 2주일 후에는 300호 짜리 대작인 '한국의 여인들'을 빼고는 모두 팔려 나갔다. 구입자들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 수집가들과 여행객들이었다. '한국의 여인들'도 뉴욕의 부호인 클루거라는 사람이 사겠다고 했다. 100호 크기의 내 작품 6점을 구입한 그는 이 작품도 자기가 사서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은 꼭 서울로 갖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팔지 않았다. 화랑 사장은 돈도 돈이지만 뉴욕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걸린다는 것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데 그 좋은 기회를 놓치느냐고 펄쩍 뛰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파리의 모든 화랑이 다 그렇듯 그 화랑 주인도 작가들의 작품을 갖고 폭리를 취했다. 모든 파리의 화랑은 작품에 대해 호당 가격을 정해 놓고 판매되면 작가와 절반씩 나누기로 계약하는데 이 화랑의 경우는 유독 심했다. 그는 나와 정한 호당 가격으로 값을 받지 않고 실제로는 그보다 10배나 높은 가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약정가의 절반만 주었다. 순식간에 팔려나간 내 작품의 총 판매액의 95%는 그가 차지하고 나에게는 5%도 주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기간에 목돈을 만지며 집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활이 어려웠던 한국학생에게 돈을 꿔주기도 했다. 하루는 내가 새 집을 사서 도배를 하고 있는데 이응노 선생의 부인이 아이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당시 이응노 선생은 전속화랑이 있었지만 파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가족들과 함께여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개인전을 하려면 목돈이 필요했다. 처음에 부인은 돈 얘기를 차마 꺼내지 못하더니 한국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신부에게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는 말을 했다. 루느라는 이름의 그 신부는 한국 화가에게 잘 대해줬는데 한국인 하나가 돈을 떼어먹고 미국으로 가버린 후 한국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마침 갖고 있는 돈을 빌려 주었다.
여담이지만 그는 전통적 동양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내가 종이를 캔버스에 붙여 그림을 그리고 액자를 만들면 서양화처럼 보인다고 말해 주었다. 이것은 내가 파리에 와서 보니 동양화는 서양화의 절반 값밖에 쳐주지 않아서 궁리하다가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이후에 그는 문자추상이라는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많은 관심을 끌었다. 나도 그의 작품이 파리 화단에서도 통할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다. 예상대로 이 선생의 전시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내 그림들이 잘 팔려 목돈을 쥘 수 있었지만 힘들게 그린 작품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몰라 안타깝다. 그때는 돈이 급해서 팔았지만 지나고 보니 꽤나 후회가 된다. 실제로 내가 그린 작품들 중에 팔기 아깝고 소중하게 여긴 것은 금세 팔려나갔고, 팔기에 급급해 적당히 그린 그림은 끝까지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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