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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사회](13)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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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사회](13) 장애

입력
2003.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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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봄 일본의 장애인 오토타케 히로타다(乙武洋匡)가 쓴 자서전 '오체불만족'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책은 오토타케 자신이 뺨과 어깨 사이에 연필을 끼고 쓴 글이다. 그는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다. 성장 과정에서 어깨쪽이 약 10㎝ 정도 자란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전기로 움직이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서 식사를 하고 운동도 곧잘 한다. 양 어깨로 농구공을 다루고 겨드랑이로 철봉을 하며 스쿠버다이빙도 즐긴다. 오토타케는 "장애와 행복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휠체어의 왕자', '나폴레옹' 등으로 불리면서 적극적이고 당당한 삶을 살아왔다. 그는 자신의 신체구조를 비정상이나 장애라는 용어로 표현하지 않고 매우 독특하다는 의미의 '초(超)개성적'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세상의 부정적 시선을 불굴의 정신과 의지로 극복해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은 스포츠 저널리스트(http://www.ototake.jp)로 활약하고 있다.

오토타케의 이야기는 자신의 신체장애를 오히려 자기실현의 기회로 삼은 감동적인 예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장애인들의 삶에 관한 극히 드문 예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장애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함께 사회적 냉대와 차별 때문에 정상적 사회생활을 꾸려가기 어렵다. 그들은 심지어 '비정상'이라는 눈길까지 받는다. 그래서 천대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동정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들 중에는 가족의 일방적 보살핌이나 사회가 베풀어주는 최소한의 보조금에 의존해 사는 이들이 많다. 때문에 적지 않은 장애인들이 삶의 의욕을 잃고 죽음까지 생각하게 된다.

장애는 이처럼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됨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맹목적인 운의 섭리에 의해 결정됐다는 점에서 사회정의를 생각할 때 중요한 주제가 돼 왔다. 장애인들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우연한 불운 때문에 여러 가지 불이익과 차별을 받는 것은 공정성 차원에서 결코 정당화하기 어렵다. 사회정의 실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인간적 존엄성을 지닌 개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서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사회가 그들의 신체적·정신적 핸디캡을 메워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물론 장애인들의 삶의 질을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한정된 사회 자원을 무작정 쏟아 붓는 것은 효율성과 정의 어느 측면에서든 문제가 될 수 있다. 중증 장애인들에게 쓰여지는 자원은 대부분 생산을 위해 재투자되기보다 그냥 소모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장애인들에게 할애하면 재생산 차원에서 사회적 비효율을 불러 장기적으로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쓸 수 있는 자원의 총량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필요와 복지를 외면하게 되는 부당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불운으로 인해 장애를 안은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원을 할애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올바른 정책 방향임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들은 다른 보통 사람들에게는 없는 특수한 필요를 안고 있으며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추가적 자원 배분이 필요하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도덕 원칙은 모든 개인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동등하게 배려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개인의 차이와 특수성을 감안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 만일 사회가 개인 사이의 차이와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똑 같이 취급하면 결과적으로는 심각한 차별을 초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들과 장애인들에게 동등하게 계단을 이용하게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장애인들의 통행을 제한하는 대단히 차별적인 정책이다. 장애인들을 비장애인들과 동등한 개인으로 대우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장소에 도달하거나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과 비슷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기초적 조건을 갖춰 주는 것이 출발점이 된다. 계단과 함께 휠체어를 사용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거나, 장애인 전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 등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실질적 변화가 사회 전체에 퍼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중요하다. 특히 장애를 열등하거나 비정상적이라는 의미가 아닌 '다르다, 차이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이런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장애인들의 특수한 상황을 배려한 정책이 지속적으로 세워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장애인 정책도 제대로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장애'는 결코 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다. 때문에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장애인들의 감정과 자존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사회에서 장애라는 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우기 힘든 낙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다른 시민들이 당연히 누리는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소외된 상태를 뜻했다. 즉, 어떤 사람이 장애인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남들이 누리는 정상적인 교육과 고용, 여가 활동, 가정·사회 생활을 누리지 못하든지, 극히 일부만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했다. 때문에 과거에는 장애인들이 스스로의 장애를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려고 하는 경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이 시각은 장애를 보호목적의 간호이든, 재정적 보조이든, 혹은 입장료를 비롯한 특정한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이든, 어떤 일정한 특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으로 이해한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렇게 바뀔 경우 장애인들은 장애를 부끄러워하거나 감추고 싶어하기보다는 장애에 따르는 혜택을 받기 위해 자신이 장애인임을 떳떳이 밝힐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장애인의 행위와 삶은 사회가 장애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다시 말해 사회가 장애를 기회 박탈의 빌미로 삼는지, 아니면 혜택 제공의 근거로 삼는지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지배적 인식은 아직까지도 장애를 주로 개인의 신체적 결함이나 문제로 한정해서 인식하고 주로 의학적 관점에서 다루려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때문에 장애인들의 삶이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대응 여하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현재 장애 문제를 보는 주류 관점인 '사회적 모델론'에 따르면 장애의 정도는 사회환경과 정책이 수적으로 소수인 장애인들의 차이를 어느 만큼 존중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소수 장애인들의 기능과 삶의 질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흑인이나 여성, 동성애자들 등 소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가 그들의 차이와 특수성을 배려할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고 본다. 법·제도적 개혁과 아울러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 및 문화 전체를 장애인들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그런 인식 변화를 반영하듯 계단식이 아닌 접근로, 휠체어가 달린 택시,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TV의 캡션이나 수화 방송, 시각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표준의 강화 등 장애인의 삶과 사회참여를 촉진할 다양한 방안들이 논의되고, 일부는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장애인의 입학과 취직을 꺼리는 관행을 시정하려는 입법·사법적 노력도 진행되고 있으며 각종 캠페인을 통해 장애인의 필요와 요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시민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또 장애인들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부정적 정체성 의식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한편 사회의 부정적 시각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도 나서고 있다. 장기적으로 이런 움직임은 장애인들의 사회적 입지는 물론 경제적·물질적 조건도 크게 개선하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불확실성과 위험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누구나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언제든 신체적·정신적 장애자가 될 가능성을 안고 산다. 우리가 이를 원하지도 않고, 선택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그런 불행을 막아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회의 자원과 기회를 배분하는 데 있어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은 우선 도덕적으로 옳지 않을 뿐더러 언제든 우리 자신과 가족, 이웃이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볼 때 신중하거나 지혜로운 처사도 아니다.

김 비 환/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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