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에 실린 유명한 이야기 한 토막이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어느 날 부들부들 떨며 끌려가는 소를 보았다. 죽여서 제사에 쓴다는 것이다. 순간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차마 못보겠다며 양으로 바꾸라 명한다. 한데 이게 문제가 되었다. 백성들은 임금이 째째하게 소가 아까워 값싼 양으로 바꾸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닌가. 선왕은 대국(大國) 제나라의 왕이다. 소 값 따위는 애초 생각지도 않았는데, 째째하다니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맹자는 선왕이 소를 양으로 바꾼 일을 상기시키면서, 소를 양으로 바꾼 그 마음이야말로 훌륭한 왕이 될 바탕이라고 위로한다. 왜 그런가. '맹자'를 더 읽어 보자. 이런 이야기가 있다.어떤 사람이 어느 날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본다. 순간적으로 아이를 붙잡는다. 그 순간 이 사람은 무엇을 생각했던가. 아이를 건져주면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인가, 아니면 자기 마을에서 칭송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아이를 구하지 않았을 경우 받을 비난을 면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인가? 맹자는 모두 아니라고 한다.
맹자의 논리는 이렇다. 그 사람이 아이를 붙잡았을 때는 오로지 아이를 구해야겠다는 마음만 있었을 뿐 다른 어떤 생각도 없었다. 아이를 건졌을 때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발동된 것이다. 어떤 계교도 일어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것은 인간의 내부에서 저절로 발동된 것이다.
소를 보고 불쌍히 여겼던 마음이나, 아이를 붙잡았던 마음은 같은 마음이다. 맹자는 생명과 타인에 대한 동정과 배려야말로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맹자는 이 마음을 확충해 나갈 때 인간은 누구나 성인이 되고, 인간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 된다고 말한다. 훌륭한 왕이 되는 방법도 딴 데 있지 않다. 소를 불쌍히 여겼던 그 마음을 백성에게까지 확장하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정치가 뭐 별 것인가.
철도원 한 분이 어린이를 구하려다가 몸을 크게 다쳤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맹자가 생각났다. 어디 맹자뿐이겠는가. 철도에 몸을 던진 그 마음이야말로 곧 예수의 마음이요, 공자의 마음이요, 석가의 마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 속에 부처와 예수와 공자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된다 하여 살 만한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부디 우리 안의 성인(聖人)다움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다친 분의 쾌유를 빈다.
강 명 관 부산대 한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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