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2만달러 시대로 - 선진경제 부침에서 배운다]<8> 독일/통일의 후유증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2만달러 시대로 - 선진경제 부침에서 배운다]<8> 독일/통일의 후유증

입력
2003.07.30 00:00
0 0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에도 통일이 급격히 이뤄지리라고 믿었던 독일인은 극소수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오늘 통일은 하나의 역사가 되었고, 통일은 폭동과 유혈사태 없이 쉽게 이뤄졌다. …(중략)…반면 당시 대다수는 경제적 측면에서 통일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봤다. 콜 수상도 약간의 돈만 통일 비용으로 내면 3∼4년 후에는 멋진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경제적 통일은 정치적 통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으로 판명나고 있다.'독일의 석학인 한스-베르너 신이 '독일의 경제적 통일-10년 후의 평가'에서 통일이 독일에 가져다 준 경제적 부담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다. 실제로 2003년 독일인들은 통일 자체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고 있으나, 보다 신중한 통일이 이뤄졌다면 경제적 부담이 훨씬 덜했을 것이라고 아쉬워 하고 있다.

통일 직전 서독과 동독은 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에서 각자 선도국이었다. 그러나 체제의 효율성 차이로 동독의 국내총생산(GDP)과 무역규모는 서독의 16%와 7.7%에 불과했다. 시장에서는 동독 돈 5마르크를 줘야 서독 돈 1마르크를 바꿀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초 서독정부는 서독과 동독이 통일하더라도 경제력 차이 때문에 경제통화동맹(GEMU)을 통해 단계적으로 동독을 흡수해야 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독일연방은행도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의 교환비율은 시장 환율에 맞춰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주민 100만명이 서독으로 넘어오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됐다. 1990년 5월 '통화·경제·사회통합에 관한 국가조약'이 체결됐고, 10월3일 마침내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면서 정치적 통일은 완결됐다.

이 과정에서 당시 헬무트 콜 수상은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독일연방은행의 권고를 무시한 채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 교환비율을 1대1로 정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서독의 노동법 및 노사관계 기본원칙을 그대로 동독에 적용, 동독 근로자들의 임금을 1994년까지 서독 수준에 이르게 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경제적 현실을 무시한 정치적 결정의 후유증은 엄청났다. 서독 정부는 1995년까지 5년 동안 1,150억 마르크(800억 달러)만 투입하면 경제통합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000년까지 총 1조2,000억 마르크가 구 동독지역에 투입됐으나 여전히 경제 격차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화폐의 1대1 교환으로 가격 경쟁력을 상실한 동독 기업들의 대량 도산으로 동독 지역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서독 노조도 동독 경제의 붕괴에 한 몫을 했다. 콜 수상의 결정으로 서독 노조가 통일 이후 동독 기업과의 단체협상을 주도했다. 서독 노조는 동독 기업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는데, 이는 동포애 때문이 아니었다. 동독 노동자가 대량 이주해 서독 노동자와 경쟁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동독의 주력 산업이던 광업과 제조업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산업생산이 통일 전의 절반 수준으로 하락했고, 통일 후 10년간 제조업에서만 100만 명이 기업 도산으로 실업자가 됐다. 2003년 동독 지역 실업률은 독일 전체 평균의 두 배에 육박하는 19%대로 추정된다.

독일 정부는 끝없이 늘어나는 통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계속해서 세금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 개인소득세와 법인세에 각각 7.5%포인트의 통일세가 부과됐고, 부가가치세율도 14%에서 16%로 올랐다. 유류세와 실업보험료, 담배세도 인상됐다.

독일 정부가 통일 비용에 재정을 투입하는 사이 독일 경제의 성장잠재력은 하락했다. 고정자본형성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통일 비용에서 발생한 대규모 통화증발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면서 독일연방은행이 90년 6%였던 재할인율을 92년 7월에는 8.75%까지 올리는 등 초긴축 통화정책을 실시한 것도 기업 경쟁력의 발목을 잡았다.

1990년 서독이 전격적으로 동독을 흡수, 통일이 이뤄졌을 때 독일은 한국에게 경이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후 독일 겪은 13년은 고통 없는 통일을 원하는 남한에게 잘못된 것을 배워서는 안 된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대상일 뿐이다.

/베를린=조철환기자 chc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