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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원의 아침편지 가족 101명 몽골서 말타기/"꿈을 다시 찾았다" 광활한 초원 달리며 "자유인"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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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원의 아침편지 가족 101명 몽골서 말타기/"꿈을 다시 찾았다" 광활한 초원 달리며 "자유인" 선언

입력
2003.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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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부터 나를 '자유인 박'이라 불러주시오, 하하하!" 웃음들이 터져나왔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를 출발, 초원의 영웅 칭기즈칸이 태어난 헨티 아이막에 설치된 '고도원의 아침편지' 캠프로 향하는 여정. 구 소련제 12인승 미니버스 '푸르공' 17대에 나눠 타고 길도 없고 표지판도 없는 480㎞의 초원을 달리는 아침편지 가족들은 부천시에서 왔다는 50대 공무원이 외친 '자유인'이란 말에 모두 공감했다. 101명의 자유인들이다. 한국일보 1면에 연재되고 있는 고도원의 아침편지 가족 101명은 지금 12박 13일의 일정으로 '몽골에서 말타기'를 하고 있다. 20일 인천공항을 떠나 울란바토르를 거친 후 헨티 아이막에서, 다시 고비사막과 몽골 제국의 옛 수도 카라코룸에 인접한 바양고비 캠프에서 8월1일까지 그들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고 있다.

# 초원의 길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망할 것이요,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9세기 몽골 초원에서 돌궐족을 다시 일으킨 대장군 톤육쿡의 말보다 더 극명하게 유목 정신을 드러내는 것은 없다. 그리고 몽골 땅에 서면 면면히 이어진 그 유목의 피가 실감될 수밖에 없다. 가도가도 끝없는 초원, 종내 바다보다 넓은 지평선이 펼쳐지는 유라시아 대륙의 한복판이다.

"100만 대군 여러분! 오늘의 행동 수칙은 '웬만하면 참는다'입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 유쾌한 주파수를 내보냅시다."

100만 아침편지 가족 중 이번 여행에 참가한 101명을 '100만 대군'으로 명명한 고도원씨는 몽골에서의 첫날 행동 수칙을 이렇게 선포했다. 수려한 경관으로 외국인을 위한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는 울란바토르 인근 테를지의 게르(유목민의 천막 가옥)에서 몽골의 첫날밤을 보낸 뒤, 7개 조로 나눠 푸르공을 타고 헨티 아이막으로 출발하는 길이었다. 참아야 했다. 포장도로는 생각할 수도 없고 겨우 말 달린 흔적만이 길로 남은 광막한 초원을 미니버스로 달린 14시간은 초원의 삶의 인내를 배운 시간이기도 하다.

한 50㎞는 달려야 게르 하나가 나타나는 길이었다. 그 밖에는 온통 눈이 시린 푸른 초원과 야트막한 구릉. 7.0에 이른다는 몽골 사람들의 시력은 초원의 삶이기에 가능하다. 10여 차례 몽골을 여행한 전문가로 이번 아침편지 가족의 여행기를 책으로 내기 위해 참가한 꿈& 들 출판사 대표 이승철씨는 덜컹거리는 푸르공 안에서 "고독과 위엄, 사람들과의 약속, 양(羊)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유목민의 삶"이라고 말했다. 50㎞ 너머 초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이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유목민의 눈, 그들의 시력은 밝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해석이다.

화장실이 있을 리 없다. 11세의 중1 학생부터 63세 퇴직자까지, 남녀가 반반 정도인 이번 행사 참가자들은 푸르공이 잠시 멈출 때마다 초원 한켠에서 '말을 보고'(남자), '꽃을 따야'(여자) 했다. 한 여성 참가자는 '꽃을 따다'가 독초에 쓸려 몽골 전통 민간요법대로 어린 사내아이의 오줌을 바르기도 했다. 그때 무지개가 떴다.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고스'라 부른다. '솔롱고'가 몽골어로 무지개이니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이다. 무지개의 나라에서 온 101인의 아침편지 가족들은 환호했다. 한국 땅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커다란 무지개가 맑은 초원의 대기 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14시간에 이른 여정의 피로를 한꺼번에 씻어주는 무지개였다.

# 드디어 말을 타다

'칭기즈 터넛(Toonot)'은 칭기즈칸이 태어난 헨티 아이막의 델리온볼다크에 설치된 캠프다. 터넛은 게르의 머리 부분에 뚫린 동그란 구멍을 가리키는 말. 유목민들은 이 구멍을 통해 게르 안에 피우는 난로의 연기를 내보내고, 밤이면 그 구멍으로 별을 보며 시간과 방위를 헤아린다. 몽골 대통령이 칭기즈칸 기념 행사 혹은 전통 축제 '나담'에 참가하기 위해 이 지역에 들르면 묵고 간다는 칭기즈 터넛이지만 당초에는 7동의 4인용 게르가 고작이었다. 칭기즈 터넛은 한국에서 온, 규모도 사상 유례 없는, 101명의 아침편지 가족들을 위해 25동의 숙소용 게르와 식당용 게르를 새로 설치해야 했다.

보는 이의 눈동자 속으로 곧바로 쏟아져 들어와 박힐듯한 몽골 밤하늘의 별에 저마다 꿈을 실어보내고 하룻밤을 지낸 101명은 22일 아침, 게르 밖으로 나오면서 다시 일제히 환호성을 올린다. 터넛 바로 곁 초원에 신기루처럼 나타난 것, 그것은 줄지어 서 있는 150여 마리의 몽골말과 그 말을 타고 온 100여 명의 현지 주민들이다. 무지개의 나라에서 온 아침편지 가족들의 말타기를 안내하기 위해 여섯 살 꼬마부터 70세 가까운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인근 지역의 주민이 몽골 전통 복식에 말을 몰고 모두 다 마중나온 셈이다.

"오늘의 행동 수칙 첫 번째는 '하나에서 열까지 조심하기'입니다. 두 번째 행동 수칙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심하기'. 세번째는 '천천히 하기, 서두르지 말기'입니다." 고도원씨가 말타기 도중의 사고를 우려해 거듭 당부한다. 참가자들 가운데는 오로지 초원에서 말을 달려보겠다는 생각으로 지원한 말 잘 타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처음 말을 타보는 이들이다. 그러니 백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수칙이다.

참가자 1명에 몽골 주민 1명을 묶은 1대 1의 말타기 연습이 시작됐다. "츄 츄"(이랴 이랴) "바룬디시"(오른쪽으로) "준디시"(왼쪽으로) "오땅"(천천히) "족스"(멈춰) 등의 말 다루는 기본적 용어를 배운 후 참가자들은 하나 둘 안장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바룬' '준'이라는 말이 '바른(오른)' '왼'과 비슷하다는 데서 다시 한번 우리의 뿌리가 대륙과 이어져 있음을 실감한다.

한두 시간 걸음마부터 배운 말타기였지만 참가자들은 이내 우려를 씻었다. 비교적 체구가 작은 몽골말과 가이드의 친절한 지도에 금방 익숙해진 100만 대군은 곧 초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기마 자세를 잡지 못해 종아리에 굳은살이 박히고, 엉덩이가 벗겨지고, 온몸에 멍이 든 참가자들도 많았지만 그 쓰라림은 말 달리는 장쾌함에 흔적도 없이 잊혀졌다. 캠프에서 5㎞ 정도 떨어진 칭기즈칸 탄생지 표지가 세워진 곳까지,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강인 오논 강물을 건너고 야생 양귀비가 노랗게 꽃을 피운 광활한 초원을 왕복해 달렸다.

칭기즈칸의 탄생지에는 어떤 유적도 없다. 그가 태어난 초원에 작은 기둥 모양의 솟대만 하나 덩그러니 박혀 있을 뿐이다. 거기 '칭기즈칸이 태어나셨던 델리온볼다크'라는 설명이 몽골 고어인 위구르 문자로 새겨져 있다. 솟대 윗부분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검정색과 평화를 상징하는 흰색의 말갈기 무늬가 새겨져 있다. 솟대는 또 몽골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파란색 천 '하닥'을 두르고 있다. 몽골인들에게 하닥은 하늘이고, 영원이고, 평안이다.

다시 말 타고 달린 곳은 1206년 마흔네 살의 칭기즈칸이 그를 도운 8명의 장수와 함께 몽골 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제위에 올랐던 곳이다. 기념 비석에는 당시 그의 옥새에 새겨졌던 문장이 선명하다. '우리가 힘을 합쳐 세운 제국은 항상 발전하고 언제나 강한 나라로 남을 것이다. 우리 제국을 여기서 세웠노라.'

오논 강과 거기로 물이 흘러드는 더없이 맑은 오논차강노르 호수에서 잠시 목마른 말에 물을 먹이고 캠프로 돌아오는 길. 한 30대 남자 직장인은 "오늘 드디어 내 자신을 찾았다!"고 외쳤고, 한 여대생은 "우리 꿈도 무지개처럼!"이라고 했다.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나, 오늘 애마부인 되다!"라고 외친 40대 주부도 있었다. 이튿날까지 계속된 칭기즈 터넛에서의 말타기를 통해 그들은 대초원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호연지기로 가슴을 채웠다.

# 아침편지 가족애

다시 울란바토르를 거쳐 고비 사막에 가까운 몽골알타이 캠프로 이동하기 전날인 24일 '고도원의 아침편지 타임캡슐' 묻기와 '고도원의 아침편지 나무 심기' 행사가 열렸다.

타임 캡슐은 10년 후 개봉할 예정. 참가자들은 여행 중 부모 연인 친구에게 쓴 편지를 내놓기도 하고 각자 지닌 작지만 소중한 물건, 스스로의 이름을 새긴 여행 명찰 등을 캡슐에 넣을 것으로 내놓았다. 한 참가자는 "10년 뒤 꼭 다시 이곳을 방문해 캡슐을 열어보고 싶다"며 "그냥 나 자신을 여기 묻어놓고 갈 수는 없을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념 식수 행사는 칭기즈 터넛 정문 옆의 작은 동산에서 있었다.

참가자 101명의 가족애를 확인한 것은 전날 밤 열린 자기 소개 시간과 캠프파이어에서였다. "제 나이 40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40년 버리고 멋있게 살아보겠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왔다는 한 남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몽골 초원에서의 말타기로 떨쳤다며 이렇게 말했다. 올해 서른 살이 됐다는 한 여성 공무원은 "서른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몽골에 와서 확인했다"며 웃었다. 어머니와 대학생 아들, 고교생 딸이 함께 온 3가족, 중1 아들을 데리고 온 여교사, 부자 참가자 등 가족 단위 참가자들도 많았지만 혼자 참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진정한 친구들을 만난 셈이다.

고도원씨는 이 자리에서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100명이 넘는 아침편지 가족이 참가한 이번 '몽골에서 말타기' 여행은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많은 아침편지 가족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매년 몽골에서 말타기 여행을 정례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몽골 민속공연과 함께 열린 캠프파이어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됐다. 별만이 하늘에 가득할 뿐 사위가 새까만 밤의 초원은 남녀노소, 한국인과 몽골인이 한데 어울려 피워올리는 우애와 열정의 불꽃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꿈꾸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몽골에서 말타기 여행에 참가해 그것을 알고 싶었다." "이번 여행이 나의 한계를 비우는 기준점이 됐으면 한다." 아침편지 몽골에서 말타기 가족들은 이 말처럼 꿈꾸면서, 한계를 깨고 스스로의 삶을 확장하는 사람들이다.

/헨티 아이막(몽골)=하종오기자 joha@hk.co.kr

사진 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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