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은 흔히 '남도 답사 1번지'로 통한다. 종교와 학문과 문화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있어서다. 호남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땅덩어리가 어떻게 해서 수많은 볼거리를 지니게 됐을까. '편안한 나루(康津)'라는 이름 그대로 예로부터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이 아닌 생활의 흔적을 남겼다. 풍요로움과 질박함의 비결을 찾아 길을 떠나 보자.강진은 말발굽처럼 생긴 땅이다. 남해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다. 강진만 혹은 탐진만이라고 불린다. 강진은 그 만을 포옹하듯 드리워져 있다. 모습이 독특하다. 강진의 울타리는 산이다. 남쪽 바다를 제외하고 북, 동, 서쪽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만만한 산이 아니다. 북쪽을 가리는 산은 '호남 제1산'으로 불리는 월출산이다. 공룡의 이빨 같은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서쪽에는 만덕산, 덕룡산, 주작산이 있다. 해발 400여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기세는 무척 사납다. 월출산을 닮은 듯 모두 가파른 바위 봉우리들이다. 동쪽에는 수인산, 화방산, 천관산 등이 버티고 있다. 마찬가지로 낮지만 험하다.
강진은 이렇게 강한 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바깥의 나쁜 기운을 차단한다고 한다. 그리고 강진의 넉넉함이 바깥으로 새 나가는 것을 막는다. 모두 바다를 바라보는 이 산들은 풍수지리적으로도 좋은 기운을 품는다. 강진의 옛말 중에 '살아서 칠량, 죽어서 보암(현 지명은 도암)'이라는 말이 있다. 칠량은 강진만을 기준으로 동쪽 산, 보암은 서쪽 산을 뜻한다. 칠량의 넉넉함 속에 살다가, 죽으면 명당인 서쪽 산에 묻힌다는 의미이다.
산 이름들을 살펴보면 재미있다. 불교적인 색채 뿐 아니라 사람들의 기운 싸움까지 묻어난다. 군동면 일대의 천불산은 전형적인 불교의 색깔를 지닌 산. 바위 봉우리가 천(千)개의 부처(佛)를 닮았다는 의미이다. 도암면의 만덕산은 천불산을 누르기 위해 만(萬)자를 썼다. 장흥과 인접한 곳에 큰 산이 있다. 만덕산 밑에 들어가기 싫어 억(億)불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북쪽 병영면 사람들이 기분이 나빴다. 일부러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이 지역의 모든 산들을 통솔한다는 의미로 조(兆)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렇듯 사연이 많은 봉우리 사이를 비집고 굵은 물줄기가 흐른다.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제1호 전령, 탐진강이다. 강 이름 자체도 '즐기는 나루(耽津)'로 흐르는 강이다. 탐진강은 전남 3대강의 하나. 장흥의 가지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높은 봉우리를 휘휘 돌아 강진만으로 빠진다. 강의 하류에 어김없이 생기는 것은 너른 벌판이다. 넓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름지기까지 하다. 예로부터 강진 사람들은 곡식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곡식과 채소가 남아돌자 이것 저것 딴 것을 만들어 보았다. 그래서 강진은 '맛 답사'의 1번지이기도 하다.
강진을 편안한 나루터로 있게 한 진정한 주인공이 있다. 마치 나무의 굵은 뿌리처럼 땅 깊숙이 들어와 있는 강진만이다. 원래 만(灣)에는 파도가 잔잔하다. 내륙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진만에는 아예 파도가 없다. 동쪽과 서쪽으로 뻗은 험한 산줄기가 물결은커녕 바람조차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의 입구에도 든든한 바람막이가 있다. 고금도이다. 큰 파도는 고금도에서 부서져 기운을 잃고 만다.
호수같이 잔잔한 강진만은 말 그대로 보물창고다. 하루 두 번씩 밀물과 썰물이 드나든다. 물이 찼을 때에는 고깃배가 뜬다. 워낙 편안한 바다여서 각종 물고기들이 산란을 위한 장소로 찾는다. 그물이 터져 나갈 정도다. 풍랑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물이 빠지면 배를 놔두고 걸어서 갯벌에 들어간다. 갯벌은 작지 않다. 강진만의 절반이 넘도록 까만 뻘흙이 드러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드넓은 갯벌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게와 조개는 기본. 물과 육지를 넘나들며 사는 희귀한 물고기까지 온통 갯벌을 덮고 있다. 보는 것 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강진의 답사 여행법은 강진만을 따라 둥근 타원을 그리며 도는 것. 대부분의 문화유적이 강진만을 따라 흩어져 있다. 강진만은 여행 내내 눈에 들어온다. 윤택한 갯벌을 보면서 느끼는 감상 하나. 다산 정약용은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비록 유배자였지만 그는 이곳에서 무척 행복했을 것이다.
/강진=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강진 먹거리 3題
맛 기행의 1번지 강진. 대표 먹거리는 한정식이다. 맛에 통달한 마을에서나 낼 수 있는 상이다. 한 상 가득히 음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접시가 2층, 3층으로 쌓인다. 약한 상다리는 정말 휘어진다. 단지 한정식만이 자랑은 아니다. 딴 곳에서는 먹어볼 수 없는, 혹은 같은 재료라도 흉내낼 수 없는 맛이 있다. 배부른 여행을 겸한다.
장어구이(목리장어센타, 061-432-9292)
흔히 '풍천장어'라고 한다. 도대체 풍천이 어디냐고도 묻는다. 풍천은 고유 지명이 아니다. 강은 바다로 흐른다. 동쪽으로 흘러드는 강은 그렇지 않지만 한반도의 서해와 남해로 흘러 드는 강은 마지막 부분에서 곡절을 겪는다. 밀물이 몰려오면 역류한다. 바닷물이 민물과 섞여 강으로 흘러들 때 따라 들어오는 것이 있다. 바람이다. 풍천(風川)은 간만의 차이가 큰 바다와 맞닿은 강의 하류를 의미한다. 넓고 길다. 이 곳에 사는 장어는 물이 들고날 때마다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운동량이 많다. 기운이 좋고 맛이 있다. 그래서 풍천장어라고 한다.
강진만으로 흐르는 탐진강은 대표적인 풍천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장어는 강진의 대표 먹거리였다. 강진 어느 지역에서나 장어를 맛볼 수 있다. 그 중 목리장어센타는 지역주민들도 주저없이 최고로 꼽는 전문 장어요리집이다. 한 곳에서 2대에 걸쳐 40년이 넘게 문을 연 집이다. 대표적인 요리는 구이.
먼저 장어죽이 나온다. 은근한 맛이다. 허기를 누그러뜨리기에 알맞다. 장어는 달구어진 철판에 놓여 나온다. 주방에서 직접 굽는다. 가스나 연탄불이 아니라 숯불이다. 옛날에는 숯불을 상에 올리고 손님들이 직접 구웠는데 객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주방에서 굽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굽는 게 아니라 태웠기 때문이다.
구이는 양념구이와 소금구이 등 두 가지. 소금구이도 맛있지만 이 집에서 개발한 양념으로 두벌구이한 양념구이를 특히 추천할 만 하다. 양념의 맛이 풍성하다. 그렇지만 결코 장어의 향기를 누르지 않는다. 상추에 싸고 토종마늘을 된장에 찍어 올린 후 입에 넣는다. 숯의 향기까지 어우러진다.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하다.
1인분에 1만2,000원. 추가하면 씨알이 좋은 장어를 골라 구워준다. 자연산 장어는 1㎏에 10만원을 호가한다. 그렇지만 귀하다. 독특한 젓갈이 상에 오른다. 장어속젓이다. '이곳에서만 맛 볼수 있는 귀한 젓갈'이라고 자랑한다. 강진읍에서 마량쪽으로 우회전하면 목리라는 이정표가 오른쪽으로 나 있다. 우회전해 50m쯤 진입하면 식당이 보인다.
짱뚱어탕(동해식당, 061-433-1180)
짱뚱어는 망둑어과의 물고기이다. '자산어보'에는 철목어(凸目魚)라고 기록 되어 있다. '눈이 튀어나온 물고기'이다. 속명이 장동어(長同魚)인데 짱뚱어를 한자로 기록하다가 발음이 변한 것이다. 겨울잠을 자는 물고기이기 때문에 잠둥어라고도 불린다. 다 자라면 18㎝ 정도 된다.
짱뚱어는 생태가 특이하다. 물과 육지를 오가며 물속에선 아가미로, 물밖에선 허파로 호흡한다. 물이 빠지면 뻘을 살금살금 기어다니며 먹이 활동을 하고, 물이 차면 뻘 속에 굴을 파고 잠을 잔다. 짱뚱어는 잡기가 어렵다. 집 근처에서 주로 먹이활동을 하는데 입구는 하나지만 워낙 많은 방공호(?)를 파고 도망 다닌다. 그리고 몸놀림이 무척 빠르기 때문에 짱뚱어 사냥은 인내와의 싸움이다. 예전에는 너무 흔한 고기였다. 간척 사업으로 갯벌이 마르고 오염되면서 이제는 귀한 몸이 됐다. 아직 살아있는 강진만의 갯벌이 짱뚱어의 산지이다.
짱뚱어는 고단백 식품이다. 보양식으로 좋고 특히 여성의 방광염 등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소화제 그 자체이기도 하다.
동해식당은 40년이 넘도록 짱뚱어만을 요리하는 전문점이다. 짱뚱어탕이 기본 요리이다. 짱뚱어를 익혀 살을 발라내고 시래기와 된장에 갖은 양념을 넣어 푹 고아낸다. '진국'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다. 구수하면서도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는다. 식당이 일찍 문을 연다. 해장 겸 아침 식사로 딱이다. 1인분에 5,000원. 전골도 있다. 콩나물과 고사리, 고구마순, 토란대, 머윗대, 호박, 감자, 미더덕 등을 넣고 짱뚱어를 통째로 끓여낸다. 탕이 진국이라면 전골은 맑은 국이다. 술안주로 제격이고 속까지 풀어준다. 2만원. 강진읍 여관 밀집지역에 있다. 프린스장 뒤편이다. 입구는 작지만 내부는 넓다.
돼지불고기 백반(설성식당, 061-433-1282)
본격적인 한정식은 아니지만 비슷하다. 한정식이 품위있고 고급스럽다면 설성식당의 백반은 서민적이고 풍성하다. 4인 기준으로 상을 낸다. 2만원. 1인당 5,000원으로 강진의 한정식을 먹는 셈이다. 4명이 못 되더라도 4인상을 받아야 하고 값을 다 내야 한다. 음식을 날라 상 위에 놓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상을 다 보아 상째 손님 앞에 놓는다.
메인 요리는 돼지불고기. 다소 투박하게 썬 삼겹살을 고추장 양념을 해 굽는다. 양념을 묻히는 것이 아니라 살 속에 양념이 배어 있다. 주방 한쪽에 마련된 커다란 숯화로에 올려 굽는다. 바싹 구우면서도 전혀 태우지 않는 것이 노하우. 돼지불고기 옆으로 삶은 음식 두 가지가 놓인다. 편육과 낙지 데침이다. 새우젓과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 젓갈과 고추장의 맛이 독특하다. 그 밖에 생선구이, 각종 나물, 젓갈, 조개탕 등이 상에 오른다. 어느 것 하나를 먹어도 맛이 부족한 게 없다.
강진읍에서 조금 떨어진 병영면 삼인리에 있다. 강진에서 장흥 쪽으로 가다가 55번 지방도로를 타고 재를 하나 넘어야 한다. 병영면 면사무소가 있는 대로의 끝에 있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강진=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가는길
서해안고속도로 또는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에서 빠져 2번국도를 타면 대불대학-독천(영암군)을 거쳐 강진에 닿는다. 왕복 4차선으로 제한속도 시속 80㎞이다. 정체가 없으면 서울에서 5시간이면 닿는다. 호남고속도로 광천IC에서 나와 13번 국도를 타고 나주-영암을 지나면 강진이다. 광주 주변에서 정체가 심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영암을 지나 강진으로 들어올 때 바위 병풍 같은 월출산을 구경할 수 있다.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하루 6차례 서울과 강진을 왕래하는 고속버스가 다닌다. 강진공용정류소 (061)432-9777. 광주까지 고속버스를 이용하고 강진까지 시외버스를 타도 된다. 광주광천동터미널(062-360-8114)에서 버스가 수시로 다닌다.
머물 곳
대형 숙박시설은 없다. 강진읍과 마량면 쪽에 장급 여관이 밀집해 있다. 플라워모텔(061-434-6606), 벨라지오모텔(433-0570), 금산장(433-3834), 뉴프린스장(433-7400) 등이 강진읍에 있는 규모가 큰 여관들이다. 마량면에는 포구 앞에 여관촌이 있다. 바다모텔(432-8818), 일광장(433-1650) 등이 있고 금호장(433-1588), 등대장(434-9006) 등은 바다가 보이는 여관이다.
● 강진 문화유적 답사
강진만의 풍요로움을 이해하면 강진의 문화 유적이 더 잘 보인다.
강진의 입구에 있는 무위사에 먼저 들른다. 무위사는 성전면 월하리에 있다. 월출산 남쪽 기슭이다. 신라 진평왕 39년(61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국보와 보물이 빼곡한 절이다. 국보 제13호인 극락보전이 아름답다. 조선의 세종 12년(1430년)에 지어진 건물로 내부에 기둥이 전혀 없다. 내부 벽에는 각종 보살과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당대 인물화가인 오도자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강진읍으로 들어서면 영랑생가를 찾는다. 마을 뒷산 초입에 있다. 영랑 김윤식이 태어난 이 집은 원래 팔렸던 것을 1985년 군에서 매입했다. 안채는 일부 변형된 것을 보수했고, 철거됐던 문간채는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복원했다. 영랑은 이 집에서 60여편의 시를 지었다. 마당에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영랑생가를 나오면 강진만을 기준으로 동·서로 방향을 택일해야 한다. 동쪽에는 도요지와 마량항, 서쪽에는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다. 먼저 서쪽으로 간다.
다산초당은 강진만이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있다. 다산이 10여년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흠흠심서 등 500여 권의 책을 썼던 곳이다.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고쳐 지었고, 다산의 거처였던 동암과 제자들이 유숙했던 서암을 복원했다. 강진만쪽으로 세워진 천일각에서의 조망이 좋다.
백련사는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 지어진 고찰. 고려 후기에 8명의 국사를 배출했던 도량이다. 역시 강진만이 내려다 보인다. 절 입구 주차장에서 절까지 오르는 숲길이 아름답다. 빼곡한 동백나무숲이다.
강진만 동쪽으로는 천연기념물이 있다. 마량포구 앞에 떠 있는 까막섬으로 천연기념물 제172호이다. 상록수림이 울창하다. 썰물이면 걸어서 섬까지 들어갈 수 있다.
강진만 동쪽에서 가장 재미있는 곳은 고려청자도요지. 고려 때 청자를 굽던 가마터로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 산재해 있다. 대구면 용문천을 끼고 도자기를 주제로 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마침 8월 1일까지 제8회 강진청자문화제가 열린다. 문화관광부가 최우수 문화관광축제로 선정한 행사이다. 남도의 흥과 맛이 함께 어우러진다. 강진군향토축제추진위원회 (061)430-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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