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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17> N씨와의 악연과 전화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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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17> N씨와의 악연과 전화위복

입력
200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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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여덟살 위인 N씨는 파리 유학시절 나와 악연이 깊었다. 고독한 유학생활에서 누구보다 가까워질 수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일로 서먹서먹하게 지냈다.나는 프랑스에 가기 전 부산 광복동 뒷골목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부터 감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당시 결혼식을 올린 것을 떠올리고 "선생님, 신혼을 축하합니다"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그는 "뭐야, 젊은 놈이 건방지게. 노인을 놀리는 거냐"고 화를 냈다. 그 일 때문인지 파리까지 동행했을 때나 또 그곳에 도착한 후에도 거리감이 느껴졌다.

어느날 각국 화가 4명씩을 초대하는 국제 전람회가 열렸다. 당시 파리에는 나와 N씨 외에 뒤늦게 파리 유학길에 오른 손동진·박영선씨가 있었다. 전람회 주최측에서는 연장자인 N씨에게 초청장 4장을 주었는데 그가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N씨는 4장의 초청장을 받아 파리에서는 자신과 박영선씨를 선정하고, 한국에서는 심사위원급이던 김환기씨와 김인승씨를 초청하려고 했다. 손동진씨와 나를 뺀 것이다. 나는 그때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메르(미술연구소)에 등록하려고 했는데 박영선씨가 찾아와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는 N씨를 만나 "지난 번 재불 외국인 미술전람회 때에도 나를 학생이라고 깎아 내리더니 이번에도 또 일방적으로 일 처리를 하느냐"고 거세게 따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나보다 화단의 선배였지만 파리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모로 경쟁관계에 있던 내가 껄끄러웠던 게다.

그런데 파리에서 생활한 지 1, 2년쯤 지나서였을까. 그때까지 나는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송금이 끊겼다. 예전처럼 6개월에 한번씩 재학증명서와 학비송금신청서를 대사관의 확인을 받아 보냈는데 중단된 것이었다. 당시 공사였던 김용식씨를 만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외무부에서 학자금을 송금하지 말라는 통지가 왔으니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 당시 유학허가가 나온 학생에게는 매달 140달러씩 은행을 통해 송금을 할 수 있었는데 70달러는 집으로 재송금하고 나머지 70달러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니 최저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생활을 했으니 궁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초 4년간 송금 받도록 돼 있었는데 3년도 지나지 않아 끊긴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림을 팔아 생활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고 또 특별한 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송금이 끊어지면 꼼짝없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게다가 김 공사의 아리송한 말은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살롱 드 메라는 전람회 모임이 있다지요? 김 선생이 최근에 회원이 된 살롱 도톤보다 훨씬 좋은 모임이라면서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나는 송금이 중단되기 직전에 살롱 도톤이라는 프랑스 미술단체 전람회 회원이 됐다. 우리나라 화가로는 최초의 회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비로소 파리 화단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말이 나왔으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절망상태로 집에 돌아온 나는 9층에 있는 내방 창에서 멍하니 밑을 내려다보았다. '떨어져 죽어 버릴까'하는 충동이 일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있다가 나는 문득 엘베화랑이 생각났다. 엘베화랑 사장은 나보다 두 살 아래로 중국계 프랑스인이었는데 내가 살롱 도톤에 출품했을 때 내 작품 앞에서 나를 기다릴 만큼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나는 그 동안 그려놓은 그림 다섯 점을 들고 몽마르트에 있는 그 화랑으로 갔다. 나는 그림을 두고 나와 영화를 보며 2시간쯤 지나서 화랑에 가보았다. 마치 도쿄미술학교 입학시험을 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릴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됐다.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집세며, 생활비를 어떻게 충당할까. 어디에서 돈을 빌릴 수도 없고 그럴 사람도 없었다. 이런 저런 고민으로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화랑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화랑주인은 날 쳐다보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 선생, 벌써 3점이나 팔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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