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영화 100년사에 '영화 황제'로 기억되는 한국인 배우가 있다. 김염(1910∼1983). 국내 최초의 양의사이며 독립운동가인 김필순의 아들로, 중국 영화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던, 그러나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책이라곤 써본 적이 없는 주부 박규원(49)씨가 자신의 작은 외할아버지인 김염의 삶을 조명한 평전 '상하이 올드 데이스'로 민음사 제정 제 1회 '올해의 논픽션상' 대상(상금 5,000만원)을 차지했다.
김염의 자취를 찾아 8년간 중국 곳곳을 찾아 다니고 미국에 사는 지인들을 만나 취재한 끝에 썼다. 6년간 친구도 안 만날 정도로 몰두하면서, 과로한 탓에 건강이 나빠져 큰 수술을 받았고, 한동안 심한 어지럼증으로 하루 두 시간 이상 깨어있기도 힘들 만큼 쇠약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정신이 혼미해질 때를 대비해 돗자리와 양산을 챙겨 갖고 중국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그를 끌어당긴 힘은 무엇이었을까.
"외증조부 김필순, 작은 외할아버지 김염 두 분이 제 몸을 빌어서 이 책을 쓰신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어떻게 이런 큰 상을 받겠습니까. 죽기 전에 한 가지라도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눈이 아파서 두 시간 쓰고 한 시간 쉬고, 다시 두 시간 쓰고, 그런 식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써내려 갔지요."
그의 집안에는 서병호 김규식 김필례 김순애 등 항일투사가 많다. 그러나, 김필순과 김염의 존재는 1995년 친정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 알았다.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던 김필순은 41세에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 그의 아들 김염은 뉴욕과 시카고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국제도시였던 1930년대 상하이에서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스타가 된다. 김염은 동포들을 돕고 항일투쟁 자금을 지원했다. 영화로 항일을 하고자 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후 중일합작 영화 주연을 맡으라는 일제의 강요를 거부하다가 위험을 느끼고 홍콩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그는 "내 영혼을 어딘가에 묶어두고 싶지 않다"며 끝까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국가 일급배우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수용소에 갇혀 중노동을 해야 했고, 이때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하나 뿐인 아들은 정신장애자가 되었다.
'상하이 올드 데이스'는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의 영화황제가 된 김염의 불꽃 같은 삶을 따라가며, 항일투쟁, 문화대혁명 등 격동의 역사와 개인의 운명을 탐색하고 있다. 저자 자신의 외할아버지 이야기인데도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완성된 책을 보고 친정 어머니가 많이 우셨어요. 독립운동에 매달린 집안에서 후손이 겪은 고난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일본인에게 독살당한 외증조부(김필순)는 치치하얼에 묻혔는데, 일본군이 묘를 불도저로 밀어버려 흔적조차 사라졌어요. 갑자기 가장을 잃고 살기가 어려워서 영화 40도의 날씨에 얼음을 깨고 남의 집 빨래를 하며 생계를 꾸리던 외증조모는 나중에야 그리 된 것을 알고 통곡을 하셨답니다."
그는 취재를 하고 책을 쓰는 것이 힘들지만 무척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김염과 그 시대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빨려 들어, 오히려 요즘 세상에 흥미를 잃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처럼 역동적으로 산 젊은이들이 또 있을까요.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비극과 고통과 좌절의 시대였지만, 그것이 그들을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고 숭고하게 만들었음을 책을 쓰면서 절감했습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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