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어머니가 세 아이를 아파트에서 떨어뜨리고 자살한 사건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동반 자살'이라는 용어는 틀렸다,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죽음을 선택할 만큼 이 사회는 살기 힘든 곳임을 증명하는 것 아니냐 등등.만일 사건의 주인공인 30대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 계모였다면 어땠을까. 물론 비중 있는 뉴스로 다뤄졌겠지만 이후 다른 논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모에 의해 저질러졌으니 그건 명백한 타살이기 때문이다.
영화 '장화, 홍련'은 바로 계모에 대한 관습에 기대어 공포를 만든다. 모든 사건은 마치 계모의 흉계로 이뤄진 듯 보이지만 실은 정신착란증을 가진 큰 딸의 머리 속에서 이뤄진 상상일 뿐이었다. 관객이 사건의 핵심에 계모가 개입됐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수많은 계모 이야기로 교육받은 탓이다.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 '콩쥐팥쥐'….
왜 계모일까.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기를 낳은 부모에게서 실망한 어린이가 자기는 버려진 아이라는 상상으로 계모상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고,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은 아이들의 잠재 의식 속에 자신에게 젖을 먹였던 선한 어머니와 젖을 끊게 하고 사회화 교육을 시키는 악한 어머니라는 두 가지 상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동화나 민담은 그런 잠재 의식의 반영이자 재생산자이며 이제 그 역할을 영화가 하고 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 보면 굳이 정신분석가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물론 '맞을 짓'을 하기는 했지만 어릴 적 맞은 후에는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친엄마가 아닐 거야." 그러나 '나는 신데렐라이며, 이 고통은 신데렐라로서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이라는 확신을 갖는 데는 늘 실패했다. 자라면서 보니 주위에도 자신의 어머니를 계모라고 의심해 본 이들이 적잖았다.
학교 앞 문구점 아저씨의 배려를 거절할 수 없어서 쫄쫄이를 사먹거나,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시험 공부를 하지 않거나, 관습에 물드는 자신을 방치할 수 없어 가끔 학교에 가지 않는 저항정신을 가진 아이에게 매를 드는 엄마를 친엄마라고 인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계모나 할 짓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정신적' 계모에게 당할 동안 대체 아버지는 무얼 했지?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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