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의 선지식]<22> 원불교의 비조 소태산 박중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의 선지식]<22> 원불교의 비조 소태산 박중빈

입력
2003.07.29 00:00
0 0

"내가 오늘 교단 만년의 기초가 될 땅을 정하였다. 동으로 솟은 미륵산의 혈맥과 정기가 흐르고 통해 이 동산이 되었다. 앞으로는 무변광야가 서쪽으로 터져 있고 이리(현 익산시) 중심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니 이 곳이야 말로 교단 만년의 터전이 될 만하다." 소태산의 말에 이인의화(李仁義華)는 반신반의했다. 소태산이 가리킨 동산동은 일본의 신사가 들어선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1937년) 교단 총부는 이리 외곽에 있었지만 이인의화는 중심가에 교당이 하나 세워지길 염원하는 마음을 소태산에게 밝힌 것이었다."어느 때에나 가서야 이 땅을 일본인들의 손에서 찾을 수 있을지 막연하기만 합니다. "

"일꾼은 일만 하고 나면 물러가는 법이다. 일본인들의 일은 이제 거의 다 끝나간다. 그들은 한 평의 땅도 차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물러갈 것이다."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일화집에 실린 내용이다. 소태산의 예언은 10여년 뒤 실현된다. 바로 동산동에 이리교당과 동산선원이 설립돼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1891∼1943)은 일제강점의 암흑기에도 결코 민족의 장래에 비관적이 아니었다. 당시 조국의 상황을 융성을 앞둔 시기로 여겼다. 또 선각자답게 많은 이적을 나타내 보였다.

"꿈에 문밖을 보니 시신 한 구가 걸려 있더라. 사람이란 느닷없이 어떤 불상사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인데 창건이가 직접 그런 일을 당한다면 마음이 어떨까."

"천명으로 알고 받아들여야지요. 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살다 보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도 일어나게 마련이지."

"인과의 이치는 그대로 믿고 순응해야지요. "

그날 오후 오창건 앞으로 일본의 탄광에 징용으로 끌려간 둘째 아들이 갱내 사고로 숨졌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소태산은 이를 미리 내다보고 꿈처럼 꾸며 제자의 마음을 달랜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은 기적이나 요행수를 아주 경계했다. 단지 교화나 포교의 방편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소태산의 발심(發心)은 7세 때 싹튼다. 자연과 우주의 신비에서 출발한 소태산의 궁금증은 곧바로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의문으로 이어진다. 의문을 풀어줄 스승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혼자 난행과 고행을 반복했다. 진리를 향한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드디어 가시밭길이 끝나는 날이 왔다.

'맑은 바람 솔솔 불고 둥근 달이 두둥실 떠오르니(淸風月上時·청풍월상시) / 우주의 삼라만상이 저절로 밝게 드러나네(萬象自然明·만상자연명).' 1916년 4월28일 이른 아침 26세의 청년 소태산은 마침내 대원정각(大圓正覺)의 환희를 터뜨렸다. 온갖 의심이 다 떨어져 나간 그의 가슴에는 천지만물의 형상과 이치가 뚜렷하게 들어와 앉았다. 우주도 둥글고 만물도 둥글고 온 세상이 다 둥근 모습으로 나타났다.

원불교에서는 원불교전서와 더불어 불교의 금강경을 모든 경전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소태산은 자신의 깨달음이 금강경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석가모니를 선각자로 존숭하는 동시에 불교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사상(四相)은 금강경의 요체다.

"아상(我相)은 매사를 자기 본위로 생각해서 자기와 자기 것만 좋다고 하는 자존심을 말하며, 인상(人相)은 다른 동물은 사람을 위해 생겼으니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인간위주의 사고방식이다. 중생상(衆生相)은 부처와 중생을 다른 존재로 생각해 중생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자조하면서 스스로 타락하여 발전이 없는 것을 이른다. 수자상(壽者相)은 나이, 경험,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권위를 내세우려는 사람들의 아만을 가리킨다." 소태산은 사상을 이렇게 풀이한다. 사상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무상주보시(無相住布施), 즉 남에게 베푼다는 생각조차 여읜 순수한 마음의 보시를 가르친다.

소태산은 초기제자 40여명중 표준제자 9명을 정한다. 표준제자는 예수의 12사도나 부처의 10대제자에 비견된다. 소태산이 남겨둔 수위제자 자리는 뒷날 정산(鼎山) 송규(宋奎)에 돌아간다. 철학자 안병욱은 "내가 지금까지 본 한국인의 얼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정산은 소태산에 버금가는 인격과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2대 교주 정산은 '불법연구회'에 머물던 명칭을 원불교(47년)로 정하는 등 교단의 기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한다.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 소태산이 인류를 향해 던진 양심회복의 외침이자 원불교 개교의 선언이었다.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해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해지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해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도리어 물질의 노예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태산은 개화의 초기에 서구 물질문명이 가져올 폐해를 예견했다. 부작용 극복을 위한 길로 새로운 도덕문명의 창조를 제시한 것이다. 구체적 실천방법은 사은(四恩)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삶을 근원적으로 지탱해주는 사은은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이다. 사은은 깨달음을 환원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천인 것이다.

동시대의 인물 중에 용성, 한영, 만공이 전통불교의 개혁에 힘을 쏟은 반면 소태산은 민족의 전통과 정서에 뿌리를 둔 민족종교의 모습으로 원불교를 일으켰다. 원불교는 전통불교와 달리 삶의 현장인 사바세계의 개선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였다. 간척사업 등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사업을 벌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제가 총부의 대중과 같이 있었던 것은 선객으로 가장해 내막을 더욱 철저하게 조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리경찰서에서 파견된 한국인 순사 황이천이 소태산에게 고백했다.

"비록 비밀경찰 노릇을 하고는 있지만 그대에게도 인간의 양심이 있고 민족의식이 있기 때문에 잘못을 반성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네."

"저 같은 죄인도 민족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민족을 괴롭히는 순사에서 민족을 보호하는 순사가 되게나." 소태산은 황이천을 상대로 사참법(事讖法)과 이참법(理讖法)을 들어 죄를 씻는 방법을 설명했다. 사참법은 가장 거룩한 대상―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앞에서 죄를 뉘우치며 좋은 일을 하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다. 이치로 깨닫는 이참법은 죄의 본성이 원래 텅 비었음을 알고 번뇌를 뿌리부터 없애려는 노력이다.

"우리의 목표는 교화 교육 자선의 세 가지이니 앞으로 이를 병진해야 결함이 없으리라." 소태산은 생의 마감을 앞두고 교단의 나아갈 바를 정리했다. 그리고 1943년 6월1일 세수 53세로 열반에 들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 원불교 "일원상" 유래는

혈인기도(血印祈禱)를 끝낸 소태산이 김제 금산사에서 한동안 휴양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소태산이 출입문의 문설주에 종이로 일원상을 그려 붙여놓았다. 원불교에서 일원상을 사용하게 된 유래다.

혈인기도는 기미년 3·1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비롯됐다. "지금 온 나라에 만세운동이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저희가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민족적 거사에 동참 의지를 밝혔다. "우리는 크게 생각하고 크게 죽을 줄 알아야 한다." 소태산은 이어 기도를 지시했다.

표준제자 9명은 4월부터 소태산과 함께 영광의 영산에서 특별기도에 들어갔다. 기도는 매월 음력으로 6, 16, 26일 세 번씩 올려졌다. 어느덧 석 달이 흘렀다. 이날 소태산은 제자들의 동의를 얻어 앞으로 열흘 동안 기도를 더 올린 뒤 그날 모두 자결하기로 결의를 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제자들 앞에는 '죽어도 아무런 한이 없다'고 씌어진 백지 한 장이 놓여져 있었다. 차례로 종이에 맨손가락으로 지장을 찍었다.

소태산이 자결의 증서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믿지 못할 이적이 일어났다. 흰 종이에서 붉은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홉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한 핏빛으로 드러났다. 아무도 손가락에 인주를 묻힌 사람은 없었다. 기도는 소태산과 제자들의 단결력을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만들었고 교단의 상징인 일원상의 탄생을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다.' 원불교는 일원상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원상은 전통적인 대승불교의 정신을 담고 있다. 일원상의 이론을 처음 세운 선종의 삼조(三祖) 승찬(僧瓚)은 "원만함이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고 의미를 풀이했다. 일원상을 그림으로 처음 표시한 이는 육조 혜능(慧能)의 제자 남양혜충(南陽慧忠)으로 전해진다. 일원상은 말 그대로 하나의 둥근 원의 모습이다. 일원상은 삼라만상의 근원을 가리키는데 완전 무결하고 위대한 작용을 하는 우주의 모습을 원으로 표현한 것이다.

선문의 종사들은 종종 제자를 인도하는 법어를 내릴 때 자주 손가락이나 털이개(拂子·불자), 주장자 등으로 허공이나 땅에 일원상을 그린다. 아니면 붓으로 그리기도 한다. 이는 진실하고 절대적인 진리, 곧 불성 불심 진여 대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 연보

1891.3.27. 전남 영광 출신 속성은 밀양 박(朴)씨

1905 양하운과 결혼

1916.4.28. 대각(大覺)을 이룸

1924. 이리에 총부를 설치하고 교단명칭을 임시로 불법연구회로 정함

1929.2.25. 대종사 호칭을 사용

1942 불교정전 저술

1943.6.1. 세수 53세로 열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