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터운 붓의 한 획으로 날렵하게 그려진 수탉이 땅을 쳐다보며 뭔가를 토하고 있다. 그 옆으로는 '무엇을 잘못 먹었길래 토해내는 꼴이라니'라는 글귀와 지각(紙刻)으로 찍힌 글자들이 있다. 작품 '뭘 먹었을꼬'의 추상적 도형과 먹물을 뿌려놓은 흔적 등은 실험적 한국화 같기도 하고 추상화나 암각화의 느낌을 준다.서예가이자 한국화가인 여태명(47·사진) 원광대 서예과 교수는 서예와 그림에 전각(篆刻)과 지각(紙刻)까지를 조화시키는 작업을 10년 넘게 해왔다. 1997년 서예의 조형미를 추구하기 위해 창립된 필묵운동 단체 '물파(物波) 그룹'의 회원이기도 한 그가 28일∼8월5일 서울 경운동 물파아트센터(02―739―1997)에서 초대전을 연다.
"'물파'는 '심물지파(心物之波)'의 줄임말로 다양한 자연물을 보고 마음에 담은 후 그것의 기운이 생동하는 모습을 필묵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파 예술은 동양의 서예와 문인화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선(線)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문인화나 남종화에서처럼 글과 그림, 전각 등의 요소를 활용해 당초의 필묵정신을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사물을 보고 느낀 감정을 회화는 물론 문자를 구성하는 점과 획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번에는 '기호 이미지와 해체 미학'이라는 주제로 물파 정신을 구현한 전각과 지각 작품, 스스로 개발한 민체(民體)로 쓴 서예작품, 생활 속의 예술로 승화시킨 아트상품 등 35점을 내놓았다.
그의 작품은 표현방식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가볍지 않고, 토속적이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닌다. 중국의 갑골문과 고대 암각화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조선시대 한글필사본 800여권을 연구한 끝에 나온 것이다. 이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시대 서민들이 즐겨 써온 편지글이나 가사집 등의 글자체를 바탕으로 도안한 민체. 그는 "도자(陶磁)에 각인된 한글이나 옛날 편지글씨에는 비록 기교는 없으나 절제된 균형과 자연스러움, 자유분방하면서도 호탕한 기상이 숨어있다"며 "이는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가 아니라 서민들의 정서와 미감을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994년 민체에 관한 한글서예판본을 출간하고 98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효봉 축제체' '효봉 개똥이체' 등 컴퓨터용 한글폰트 6종을 CD롬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의 제자(題字)와 각종 책의 제호, TV 자막 등에 쓰이고 있다.
그는 "전통적 서예와 전각, 회화를 접목시키면서 문자를 해체하고 단순화하는 작업과 함께 이를 활용한 실용적인 상품 개발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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