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사찰 화단이나 시골집 오래된 정원 한 켠에서 간혹 상사화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연분홍빛 꽃송이들이 얼마나 고운지…. 이 식물은 꽃이 필 때는 잎이 나지 않고 잎이 날 때에는 꽃을 볼 수 없어, 즉 만날 수 없는 서로를 그리워한다하여 상사화란 이름이 붙었습니다.그래서 이 꽃에 붙여진 사연도 절절한데, 세속 여인을 사랑한 스님이 만날 수 없는 여인을 그리워하며 절 마당에 심었다고도 하고, 반대로 스님에 대한 사모의 정을 키우던 여인이 수도중인 스님의 방 밖에서 그리움만 키우다 된 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꽃을 주로 절에서 볼 수 있다는 점, 꽃의 이름과 사연, 그리고 아름다우면서도 은근한 그 자태가 모두 한 느낌으로 와 닿습니다.
하지만 상사화는 알고 보면 이렇듯 애절하고 수동적인 식물이 아니랍니다. 더러 사람도 알고 보면 선입견과 전혀 다른 모습 일 때가 있듯이 말입니다. 우선 상사화의 잎과 꽃은 서로를 그리워할 리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듯 식물에 있어서 꼭 만나야만 하는 대상은 잎과 꽃이 아니라 암술과 수술(식물에 따라서는 암꽃과 수꽃)이기 때문입니다.
상사화는 살아가는 방식도 다릅니다. 아주 살이 많이 찐 부추같기도 하고 양파 같기도 한 새순이 봄에 삐죽 삐쭉 올라오다가 이내 초록빛이 무성한 포기를 만듭니다. 그만큼 열심히 광합성을 하여 알뿌리에 양분을 비축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여름이 시작되고 어느 날 문득 바라보면 땅 위에서 사라져 버렸지요.
긴긴 장맛비도 그치고 여름이 무르익고 있다고 느낄 즈음, 다시 어느 순간 쑥 꽃대를 올려 보내 꽃을 피웁니다. 물론 잎도 없이. 꽃대 하나마다 여러 송이의 큼직한 꽃송이들이 사방을 향해 달려 한 포기를 이루면 그 앞에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지요. 상사화는 사라지고 나타나는 방식도 극적일 뿐 아니라, 한 계절 비축했던 것을 소진하며 한 여름을 자신의 계절로 마음껏 향유하겠다는 당돌함이 마치 신세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상사화는 사람의 손에 의해 키워진 지 너무 오래된 탓에 본성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의 입장이 아닌 식물 입장에서 꽃의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는 열매를 잘 맺지 않을 뿐 아니라, 열매가 달린 듯해도 후손이 될 씨앗은 여물지 않습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리워하다 죽어가는 그런 소극적인 절꽃은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왜 절에 많냐구요? 사연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상사화 알뿌리의 방부효과 때문입니다. 불경같이 종이를 배접해 책을 엮는데 쓰는 접착제에 넣거나 탱화를 그릴 때 섞으면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 않게 해주니 항시 곁에 심어두고 이용했던 것이죠.
상사화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는 것이 병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고운 상사화 분홍 꽃빛을 넋놓고 바라보며 이제는 아련해진 첫사랑의 추억에나 빠져드는 것이 더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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