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양면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쿠바가 26일로 혁명 50주년을 맞았다.1953년 이날 26살의 피델 카스트로는 129명의 동지를 이끌고 독재자 풀겐시오 바티스타의 산티아고데쿠바 소재 몬카다 병영을 기습, 혁명의 첫 총성을 울렸다. 이 거사는 실패했지만 3년 후 혁명 성공의 신호탄이 됐다.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1만 명의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옛 몬카다 병영에서 거행된 50주년 기념식은 '피델'을 연호하는 함성으로 시작했다. 이어 학생들이 당시 혁명군처럼 BB소총으로 병영을 습격하는 장면을 재연했다. 카스트로는 "그토록 어린 나이에 혁명에 나섰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혁명의 위대함을 강조했다.
쿠바 정부는 이날을 1899년 쿠바 독립 후 이어진 독재자들의 탄압과 대미 예속의 사슬을 끊는 첫 걸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당시 아바나대 법대를 갓 졸업한 카스트로는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하원 의원 출마를 포기할 수밖에 없자 동지를 규합, 몬카다 기습을 감행한다.
하지만 혁명군은 궤멸됐고, 55명의 동지가 잔인한 고문으로 죽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이때 카스트로는 유명한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라는 법정 진술을 한다. 그는 "감옥은 나에게 혹독한 시련을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독재자를 두려워하지 않듯 이 또한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에게 유죄를 선고하라. 그러나 역사는 나를 사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연설은 그가 쿠바 민중의 뇌리에 각인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5년형이 선고된 카스트로는 20개월 뒤 사면으로 풀려나 멕시코에서 '7월26일 운동'을 조직, 동지들을 재규합했다. 56년 조각배 '그란마'를 타고 쿠바로 돌아온 그는 전설적인 공산주의자 체 게바라, 동생 라울 등과 게릴라전을 감행, 59년 1월 마침내 정권 탈취에 성공했다.
이후 카스트로는 61년 미국의 피그스만 침공,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의 시련을 넘긴 뒤 80년대 중반까지 쿠바를 의료·교육 보장제도가 가장 잘 갖춰진 중남미 제3대 부국으로 키웠다.
몬카다 기습의 생존자들은 "기습이 없었다면 우리도 다른 중남미 형제들처럼 비참한 처지로 남아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쿠바 내 반 카스트로 감정이 점증하고 있다는 게 BBC방송 등 서구 언론들의 관측이다. 구 소련 붕괴 후 쿠바의 산업생산은 정체상태이며, 관광과 인력수출로 근근히 연명하고 있다. 자연 민중의 불만도 커져 카스트로는 올 4월 반대자 75명을 구속, 미국과 유럽의 반발을 샀다. 50주년 기념식을 서구 언론에 개방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쿠바 역사는 카스트로에 대해 관대했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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