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A 코헨 지음·이남희 옮김 산해 발행·1만5,000원역사를 재구성할 때는 다양한 수준의 편견과 왜곡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대중적으로 가장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TV 사극이나 역사소설이다. '본질은 창작'이라는 '경고문'을 눈에 띄게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달 과정에서 엄청난 오해를 낳게 마련이다.
학자들의 역사 서술은 더 중요하다. 교과서는 말할 것 없고 전문 연구자들이 쓴 역사책은 사실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잘못될 경우 그 파장이 크다. '학문의 제국주의―오리엔탈리즘과 중국사'(원제 Discovering History in China―American Historical Writing on the Recent Chinese Past)는 1960년대까지 미국 학자들이 19·20세기 중국 근현대사를 연구한 방법론과 시각에 어떤 잘못이 있었는가를 분석한 책이다.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인들의 저작에는 중국 근현대사 중에서도 서양 자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방면이나 사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 중국과의 무역, 조약에 의해 개항된 항구에서의 생활이나 제도, 의화단운동, 쑨원(孫文), 외교관계, 기독교 선교사업, 일본의 중국 침력 등이다. 이유는 당시 미국인 연구자 대부분이 중국어로 쓴 자료를 이용할 줄 몰랐다는 점과 근대적인 것은 곧 서양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양적인 것은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지적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웰즐리 칼리지 교수인 저자는 미국 학자들의 중국사 연구 오류를 충격―반응론 근대화론 제국주의론의 3가지로 구분했다. 초점은 다르지만 한결 같이 서양중심적 왜곡을 담고 있다.
19·20세기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 중 서양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건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충격―반응론'은 대부분의 사건을 서양에 대한 반응인 것처럼 해석한다. 게다가 서양이 명백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고 거꾸로 어떤 사건이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을 부각하는 한에 있어서만 중요하다고 판단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1954년에 간행된 존 킹 페어뱅크와 덩쓰위(鄧嗣禹)의 '서양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나 폴 클라이드와 버튼 비어즈 공저로 널리 읽힌 '극동―서양의 충격과 동양의 반응의 역사' 등이 이런 유형에 해당한다.
'근대화론'은 변화란 어떤 것이며 어떤 종류의 변화가 중요한가 하는 문제를 서양의 제한된 경험에 근거해서 정의하고 그것을 중국사에 적용하는 잘못이다. 서양 근대의 역사에서 생기는 문제를 중국에 들이미는 데 관심이 있으며 거꾸로 중국의 역사 자체에서 생기는 물음을 던지는 데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중국은 과연 서양처럼 근대과학이나 산업혁명을 자생적으로 이룰 수 있었을까, 만약 그럴 수 없었다면 어떤 원인에서인가 하는 식이다. 조지프 레벤슨의 책이나 중국사 교과서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책 중의 하나인 '동아시아 문명의 역사'가 그런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제국주의론'은 반대로 중국의 역사가 자연스럽고 정상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서양 제국주의가 그 경로를 방해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과거 한 세기 반에 걸쳐 중국이 당한 모든 나쁜 일의 원흉으로 서양을 지목하고 일관되게 유해한 존재로 간주하는 식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제자인 프랜시스 몰더의 저술이 이에 해당한다.
주로 60년대까지 미국 내에서 나온 중국사 관련 저서와 저술을 중심으로 한 꼼꼼한 비판 이후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중국 자신에 입각한(China-centered)' 방법론이다. "중국적 상황에서 설정된 중국의 문제로부터 출발해, 중국 역사의 규모와 복잡성을 자세하게 다룰 수 있는 좀더 작은 단위로 분해하고, 또 중국사회를 여러 수준에서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존재로 보고, 사회과학 같은 역사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 발전된 이론, 방법론, 기법을 역사적 분석에 통합하려는 방법"을 말한다.
이 책은 중국 대만 일본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 이미 번역됐다. 저자가 96년 재판을 내면서 새로 쓴 머리말에 "박사학위 구술시험을 앞두고 바짝 긴장한 대학원 학생들이 선호하는 책이 되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인기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중국 근현대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짧은 시간에 비판적으로 두루 섭렵할 기회를 주는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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