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조재현 옮김 서해문집 발행·8,500원서해문집에서 펴내고 읽는 쉽게 읽는 고전 시리즈 '오래된 책방'의 다섯째 권 '계축일기'가 최근 나왔다.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조선 3대 궁중문학으로 꼽히는 '계축일기'는 1613년(광해군 5년 계축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가 폐위된 뒤 왕후와 내인들이 겪은 일을 기록한 궁중 비사이다. 인목 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손자인 영창대군을 앞세워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무고로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인목 대비가 서궁인 덕수궁으로 쫓겨가 11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복위하기까기 겪은 고초가 담겨 있다.
당시 한글로 쓴 것을 요즘 말로 풀어서 펴낸 '계축일기'는 여러 권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새삼 눈 여겨 보는 것은 시리즈로 앞서 나온 '북학의' '징비록' '하멜 표류기'처럼 이 책 역시 온갖 사진과 그림 자료, 상세하고 친절한 용어 해설을 담아 고전 읽기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체제로 편집돼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대제각에서 펴낸 '한국고전총서' 제4권 중 '고대여류문학선'에 들어 있는 '계축일기' 영인본(낙선재본)을 토대로 하고, 기존에 나온 '계축일기'를 충분히 참고한 이 책은 우선 글이 쉬워 읽기에 부담이 없다. 폐위된 인목 대비 주변 내인들에 대한 억압과 학대가 주요 내용이어서 저주와 암투가 뒤섞인 처절한 정황이 사극의 생생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예전의 '계축일기'가 궁중 여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룬 데 비해 이번은 당시의 궁궐 생활, 문화, 언어 등의 역사적 면모에 집중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듣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마마' '아기씨' 등의 단어 어원이나 변천 과정, 또 광해군 쪽에 붙어 큰 권세를 누렸다는 상궁 '김개똥'을 왜 '김가히'나 '김개시'라 부르는지, 또 '공주'와 '옹주'의 차이는 무엇인지 등이 상세히 나와 있다.
원본이 언문인데 뭘 옮겨 새로 쓸 게 있느냐고 할 수도 있다. 원저를 풀어 쓴 국민대 강사 조재현씨는 "한글로 썼다고 해서,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말한다. 이런 종류의 글은 띄어쓰기나 쉼표, 마침표가 없고, 문장의 주어나 서술어가 명백하지도 않으며 아예 술어 자체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사진·그림 자료가 풍부하고 주석이 친절하다 하더라도 400년 가까이 지난 옛 궁궐의 일을 시시콜콜 읽어나가는 게 뭐 그리 구미가 당길 일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씨의 감상은 이렇다. "생각해 보면 필자에게 '계축일기'을 읽는 과정은 좀 까다로운 사람과의 사귐과 같았다. 그 사람은 꽤 박식하지만, 가슴에 맺힌 것이 많은 듯 푸념이 좀 심했다. 또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생각 등을 고집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와 오래 있으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그 유별난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그는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걸어 나와 다른 호흡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굳이 휴가 때문이 아니라 여름은 어쩐지 고전과 가까워질 수 있을 듯한 계절이다. 이런 때 쉽게 풀어낸 우리 고전을 한 권 손에 쥘 수 있다는 건 예상하지 못한 선물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시리즈 넷째 권으로 먼저 나왔어야 하지만 늦어져 8월 중순에 선보일 '한중록'도 기다려진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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