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베르트 슐라이허르트 지음·최훈 옮김 뿌리와이파리 발행·1만2,000원볼테르가 어떤 신학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피타고라스, 공자, 소크라테스, 키케로, 에피쿠로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영혼이 창 끝에 찔려 악마에 의해 영원히 구워지고 있다고 믿습니까?" "그들은 영원히 구워집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일은 없고 이보다 더 정의로운 일은 없지요."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 이처럼 심각하진 않더라도 누구나 생활에서 이른바 종교적 '꼴통'과 마주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상식을 벗어난 확고한 신념, 이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강렬한 믿음을 가진 사람과는 아예 대화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철학자인 저자는 그런 대화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유가 있다. 이데올로기 종교 열광 비전 교조 교의 신앙 미신 정통 이단 그리고 그밖에 무엇이 됐든 이성을 내팽개친 맹목적인 믿음은 인권 침해를 유발하거나, 또는 그런 상황을 옹호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논증이론과 계몽철학을 가르쳤던 저자는 이성을 무시하고 인권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근본주의자들과 맞서는 방법을 이 책에서 일러주고 있다.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박해하는 이들이 주로 내세우는 논거로 저자는 열두 가지를 열거한다. 그 중 한 가지가 '무지한 중생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지' 하는 식의 '목자 논리'이다. '원수진 사람이 열병에 걸려 낭떠러지로 달려가는데 그를 잡아서 묶지 않고 그냥 달려가게 내버려둔다면 그것이 잘하는 일인가'(아우구스티누스)
하지만 슐라이허르트는 이단자나 비신자를 미친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구별 논거'를 반박의 논리로 제시한다. 비유가 유용할 때도 있지만 전혀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영원한 축복의 문제에서는 사람의 내적인 태도가 중요하지 강제를 통해 달성된 외적 행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꼴통'들과 마주하는 최후의 수단은 웃음이다. '모든 종류의 이데올로기들, 그 중에서도 특히 종교적 교의는 웃음을 싫어한다. 웃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생각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백 마디 말보다 차라리 웃어주는 게 좋겠다. 신념에 찬 목소리로 허황된 종교를 강요하는 사람 앞에서는.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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