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윤·최영수·이희수 외 지음 청아출판사 발행·1만5,000원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 실크로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숨길이었다. 동서 문명이 이 길을 통해 오가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 동안 국내에서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이나 사막을 거쳐가는 육상 루트에 쏠려 있었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육상 실크로드에 가려져 크게 주목받지 못한 해상 실크로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해양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출발한다. 서쪽으로 말라카 해협을 거쳐 인도양으로 빠져나가서 다시 페르시아 만과 홍해를 건너 북아프리카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이베리아 반도의 끝 포르투갈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이 머나먼 바닷길을 처음 개척한 것은 중국인들이다. 기원전 111년 한(漢) 무제가 베트남 북부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이 시작이다. 그러나 8세기 전후로는 이슬람 세력이, 16세기에 이르면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이 차례로 해양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 책은 바다의 실크로드가 지나는 주요 길목에 발달한 무역 거점을 따라 해양 실크로드의 개척사를 살피고 있다.
당나라 때부터 원나라 시절까지 서역 상인들로 들끓었던 중국 동남 해안의 광저우(廣州), 포르투갈에 점령되기 전까지 15세기 100년간 강력한 무역왕국을 건설했던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중세 내내 인도양 무역을 주도한 인도의 캘리컷에서 해양 실크로드의 아시아 연결망을 점검하고,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해상무역을 장악한 이탈리아 도시국가 베네치아 상인들의 활약과 15세기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의 동진(東進)을 다룬다. 지역과 국가 별로 안배된 각 장은 해당 지역 전문가 9명이 나눠 썼다.
해양 실크로드의 역사에서 중국이 가장 눈부시게 등장하는 대목은 명나라 시절 정화(鄭和) 제독의 대원정이다. 1405∼1433년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진행된 이 항해는 매번 수 만명을 실은 100여 척의 배로 수십 개 선단을 이루었고, 멀리 홍해 입구의 아덴과 아프리카 대륙 동북부 케냐까지 갔다.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 탐험대가 동인도 항로를 찾아 나섬에 따라 해양 실크로드는 유럽 식민주의가 아시아로 파고드는 루트로 변한다.
이 책은 해양 실크로드를 따라 오간 동서문물의 교류를 자세히 보여주는데 그 중에는 천 년 전 한반도 남부 신라와 이슬람권의 교류를 다룬 흥미로운 장도 포함돼 있다. 8∼9세기 경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이 신라에 본격적으로 진출함에 따라 신라 수도 경주는 당시 코스모폴리탄의 도시이던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이슬람 제국의 바그다드, 당나라 수도 장안과 하나로 이어져 거의 '동시 패션시대'를 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유행이 경주에 상륙하는 데는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책은 해양 실크로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학술적 접근을 모은 것이지만 딱딱하지 않고 쉽게 쓰여졌다. 실크로드를 통해 이뤄진 동서 교류의 유산을 보여주는 사진과 지도도 많이 들어있다.
철길로 남북한을 잇고 중국과 시베리아를 거쳐 서유럽 한복판 파리까지 가는 이른바 '철의 실크로드'가 21세기의 국제적 프로젝트로 떠오른 지금, 무려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해양 실크로드의 역사를 돌아보는 이 책은 각별한 흥취를 불러일으킨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바닷길을 열어 낯선 세계로 떠났던 옛 사람들의 흥분과 고통을 헤아리면서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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