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 책을 든 남녀 10여 명이 모였다. 인터넷 독서동호회 '책읽는마을'(www.freechal.com/bookvil)의 '책 교환 번개 모임'이다.김현미(28)씨가 장 에슈노즈의 장편소설 '나는 떠난다'를 꺼내놓았다. "1999년 공쿠르상 수상작입니다.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 감각이 빛나는 소설이에요. 일상에 대한 일탈의 욕구가 반영돼 있지요. 묘사가 세밀해서 한 평론가는 에슈노즈의 소설을 읽다 보면 파리의 거리를 걷는 듯하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변광무(29)씨가 내놓은 책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는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오래도록 읽힐 책이라고 생각해 가져왔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권할 만한 책을 가져와서 교환해요. 재미있을 듯한 책은 서로 가져가겠다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기도 하지요." 이선열(30)씨의 귀띔이다.
'책읽는마을'은 1996년 12월 10명이 뜻을 모은 작은 모임으로 시작됐다. 푸른 화면에 하얀 글씨가 찍히는 PC통신 시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몇몇이 채팅방에서 수다를 떨다가 아예 모임을 하나 꾸려보기로 했다. 그 즈음 만들어진 독서동호회 중 하나였던 게 생명력이 길었다. PC통신 쇠락기에 많은 동호회가 공중분해했지만 '책읽는마을'의 활동은 시들지 않았다.
2002년 5월 인터넷 커뮤니티 프리챌(www.freechal.com)로 자리를 옮겼다. 10명으로 시작한 모임이 이제 회원 480명의, 오랜 역사를 가진 동호회가 됐다.
발기인의 한 사람인 권오성(35)씨는 "책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공감대가 긴 호흡을 뒷받침한 것"이라고 말했다. "갑자기 큰 돈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차를 사고, 옷을 사고, 세계일주를 떠나고…,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책읽는마을' 회원들은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사겠다'고 입을 모았지요."
책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모였으며, 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아서 모임이 이어진다. 책 사랑은 온라인 모임, 사람 사랑은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서 이뤄진다.
마스터 차영진(31)씨는 "책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데 치우치고, 그래서 사람이 다치는 경우를 봤다"면서 "'책읽는마을'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한때 오프라인 모임에서는 책 얘기는 금지하기까지 했다"고 소개했다.
온라인 게시판에서 가장 활발한 '책 이야기'는 독서 감상기다. "김연수의 소설 ' 빠이 이상'은 여전히 매혹적인 작가 이상을 소재로 하고 있다. 소설가가 직업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설가로서의 기질과 힘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그 마음 속의 것을 어떻게 소설로 써내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 기질이 소설 속에서 느껴진다." "천운영의 소설 '바늘'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뱉었던 가시 돋친 말들이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와 내 온몸을 휘감다가 결국은 나를 삼키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싶습니다."
사회적 이슈를 토론하는 '주제가 있는 마을'에서는 최근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의 인기로 화제가 된 '동거'를 두고 "동거도 사랑 표현의 하나" "동거는 단순한 희망적 유행일 뿐" 등 논의가 한창이다.
오프라인 모임터인 신촌의 카페 '크로스아이'에서는 언제나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는 회원들을 만날 수 있다. 매일 찾아오는 회원들에게 정이 들어 카페 주인은 가게를 정리해야 할 즈음에 선뜻 카페를 넘겨주었다. '책읽는마을' 회원으로 '크로스아이'를 운영하는 오강훈(30)씨는 "책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이 일상을 나누는 공간"이라고 소개한다.
'책읽는마을'은 '사람 안에 책이 있다'는 믿음을 몸으로 실천한다. 회원들이 책을 기증해 전국의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보낸 지 3년 째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도움을 위해서는 책 뿐 아니라 '기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최근에는 책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을 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차영진씨는 "독서의 효과가 절정에 이르는 때는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순간"이라며 "'책읽는마을'의 모든 활동은 책을 읽고 세상과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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