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3자 회담은 불완전한 대화 구도라 할 수 있다. 죽은 제갈량이 환생하더라도 세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는 합의를 만들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을 신속하게 이끌어 내는 장점은 있다. 대체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생각이 같거나 비슷한 한 쪽 편을 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북한의 핵무기 개발시인 파문으로 중단됐던 베이징 3자 회담이 내달 속개될 모양이다. 중국정부의 활발한 왕복외교 결과다. 미국과 북한이 동상이몽이지만 한반도의 불안정 구도가 이를 계기로 가닥이 잡혔으면 한다. 다자 회담의 징검다리쯤으로 생각하는 미국과, 미국과의 담판을 통해 생존을 보장 받으려는 북한사이에서 중국이 얼마만큼 중재력을 발휘할지 궁금하다.
본래 한반도문제 해결에 3자 회담 방식을 꺼낸 사람은 지미 카터다. 남북전쟁 후 최남단(Deep South) 출신의 첫 대통령이기도 한 그는 남북한의 두 독재자를 대화 테이블에 불러내려 시도했다. 이 인권지상주의자의 눈에는 북녘의 '수령 체제'나 남녘의 '유신체제' 모두가 분단대치를 핑계로 백성을 억압하기는 마찬가지 구도라고 보지 않았나 싶다.
카터는 김일성에게 남북한과 미국간의 3자 회담을 제의했다. 그러나 김의 대답은 'NO'였다. 적대관계를 해소하려면 미·북한이 마주앉아야지 왜 남한을 끼우려 하느냐는 게 거부 이유였다. 김은 또 3자 회담을 남한과 미국이 '짜고 치는' 2대1의 불리한 게임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카터의 제의를 거부한 것이 전략적 실수임을 김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일성은 3자 테이블에서 한국을 무시하고 미국과 직접대화 하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2대1의 불공평한 게임이 아니라, 미국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카터가 재선에 실패했다. 대신 '강력한 미국'을 주창한 레이건 정부가 들어섰다. 김일성은 미국과 직접담판이 가능한 3자 회담을 요리조리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1983년 10월8일, 북한은 극비리에 중국을 통해 미국에 3자 회담을 전격 제의했다. 카터의 제의를 걷어찼던 김일성이 한국의 참석까지 양해한 것은 의외였다. 그날은 동남아 순방 첫 기착지, 미얀마(구 버마)에 도착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미얀마 건국영웅 아웅산 장군 묘소 참배를 하루 앞둔 시점이다. 이튿날 김일성이 보낸 특공대는 폭탄테러로 전 씨 일행 중 17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았다.
북한의 회담제의가 테러극을 호도하려는 음모가 분명했기에 한국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은 못내 아쉬워했다. 테러충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즈음인 그 해말, 미국은 회담의 불씨를 살리려 한국정부를 비밀리에 압박하기 시작했다.
84년 1월7일자 한국일보 1면의 1단 기사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북한이 제의한 3자 회담은 성실성이 결여된 평화공세'라는 게 요지였다. 은밀하게 논의되던 '3자 회담'이 누설됐다고 난리가 났다. 그제 부음이 전해진 리처드 워커 당시 주한 미 대사의 드센 항의로 발설자 색출령이 떨어졌다. 기사를 쓴 기자를 비롯, 외무차관 차관보 등이 남산의 지하실로 연행돼 고초를 겪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3자 회담은 물 건너 갔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베이징의 3자 회담도 중국이 한국을 대신했을 뿐 카터나 김일성이 시도했던 형식 그대로다. 북한이 중국의 어깨너머로 미국과 직접담판 하려는 모습도 꼭 같다. 문제는 북한의 핵개발 의도를 어떻게 제어하느냐 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핵병기가 인민의 주린 배를 채우는 데 유용한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진실로 북한 핵 제거를 바란다면 그들의 체제보장 요구를 수용 못할 이유가 없다. 또 북핵의 평화적 해결이란 외교적 승리가 부시의 재선가도에 큰 도움이 될 것은 자명하다. 다만 이를 일깨우는 것은 우리 외교가 담당해야 할 몫이 아닐까 싶다.
jhrho@hk.co.kr 노 진 환 주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