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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14>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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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14>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입력
2003.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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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1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5인은 심재권(沈載權·전 서울상대 3년·당시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 위원장·현 민주당 의원) 이신범(李信範·전 서울법대 4년·당시 '자유의 종' 발행인·전 신한국당 의원) 장기표(張琪杓·전 서울법대 3년·현 한국사회민주당 대표) 조영래(趙英來·사법연수원생·90년 사망) 김근태(金槿泰·전서울상대 3년·현 민주당 의원)였다. 이들의 이름에 '전'자가 붙은 것은 10월 15일 발표된 위수령(衛戍令)과 함께 대학에서 제적됐기 때문이었다.

위수령 발표 당시 김성진(金聖鎭) 청와대 대변인은 "최근 북괴의 군 증강, 혹한기 훈련, 징집연령 인하, 휴전선 정찰, 대남공작 강화 등의 조짐으로 볼 때 금년 겨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시기라고 판단된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박 대통령은 "현재 북괴의 전쟁 준비 상황은 6·25 전야를 상기시키고 있다"면서 "국가의 안보를 위해 국민의 자유권이 유보되는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했다.

소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명명된 당시 중앙정보부 발표는 5명의 서울대생이 5·16 군사쿠데타를 능가하는 작전을 수립한 것으로 돼 있다.

중정은 "이들은 지난 대통령 선거(71년 4월 27일)를 전후로 교내와 하숙집 등에서 모의, 학생 데모를 일으켜 경찰과 충돌을 유도하고, 이 때 사제폭탄을 사용해 중앙청을 습격해 장악하고, 이어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또 "이들은 현 정부를 전복한 뒤 '민주혁명위원회'를 구성, 4·27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金大中)씨를 위원장에 추대하고, 부정부패자 처단을 위한 '혁명입법'까지 미리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중정이 발표한 이같은 '9단계 국가전복 계획'은 당시 '희망의 아홉 고개'로 희화화 해 인구에 회자됐다. 이 사건은 3선 개헌 이후 시작된 '민주수호 운동'의 뿌리를 잘라내기 위한 조치였으며, 위수령 발표를 정당화 하고 '국가비상사태' 선포의 빌미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해 4월 8일 오후 7시 서울 YMCA 8층 회의실에서는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화계 등 각계 인사들이 모여 4·27 대선의 공명을 다짐하고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를 결성키로 했다. 민주수호 운동은 대학으로 이어졌다. 4월 14일 오전 11시 서울대 상대 도서관에서 전국 11개 대학 학생대표 200여명이 모여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을 결성하고 심재권(서울상대 3년)을 위원장에 추대했다.

학생 대표들은 대학이 폐쇄되는 한이 있더라도 교련교육은 반대한다 공명선거를 위해 대학 단위로 선거참관단을 파견한다 등 10개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4월 19일 학생연맹 대표들은 고려대 학생식당에서 4·19 기념식을 갖고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3선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의 야욕은 국민주권을 우롱하고. 배신과 아부가 판치는 반윤리를 사회에 만연시켰다. 우리는 사라져가는 대학의 자유를 되찾고, 이번 대통령선거가 타락·부정 선거로 점철되지 않도록 모든 힘을 쏟겠다."

5월 3일 학생연맹 대표들은 서울대 도서관 휴게실에 모였다. 그들은 전국에서 선거를 참관했던 학생들의 보고서를 근거로 '4·27 선거는 4·19를 촉발한 3·15 부정선거보다 더 타락했고 지능적으로 자행됐다'고 결론 지었다. 민주수호 운동은 위수령과 국가비상사태 선언 등으로 일단 잠복하지만 결국 74년의 민청학련 사건에서 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학생·시민운동의 마그마가 된다. 법대 주간지 '자유의 종'은 부정선거 백서를 르포 형태로 연이어 게재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은 철저하게 당국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위수령 전후로 제적돼 강제 입영된 학생들이 검찰측 증인으로 군복을 입고 법정에 끌려오는 해괴한 모습까지 연출됐다.

당시 검찰측 증인으로 나선 3인의 병사 가운데 한 명인 최회원(崔會元·71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씨의 설명. "11월 17일 군에 강제 징집됐다. 전방에 배치돼 훈련을 받고 있었다. 72년 5월께였다. 검은 승용차가 소대 막사 앞에 도착하더니 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서울로 갔다. 선배들의 재판에 검찰측 증인으로 불려간 것이었다. 검찰에서 '사전 교육'을 받았다. 입대 직전 중정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 때 '이 정부가 전복됐으면 좋겠다'는 진술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대목을 증언하라고 했다. 그래야 '내란음모'가 성립된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종전의 진술과 다르면 위증죄로 구속된다'고 협박했다. 법정에서 '그것은 나의 생각이었고 희망이었을 뿐이었다'고 증언했다. 차라리 선배들과 함께 구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배들의 실형을 막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 심재권 당시 민주수호 전국청년학련 위원장

10월 15일 위수령으로 시위 주동 대학생들에 대한 제적과 강제 징집이 이어졌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건'이 필요했다. 64년 6·3 계엄령 직후의 1차 인혁당 사건(불꽃회 사건), 67년 전국 대학 휴교령·조기방학 직후의 동백림 사건, 74년 긴급조치에 이은 민청학련 및 2차 인혁당 사건 등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은 완전한 허구였다. 그것은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 사건과도 또 달랐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5명을 가둬 놓겠다는 방침 아래 사건이 제작된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활동하는 범위도 달랐다. 장기표 이신범 조영래는 법대 주간지 '자유의 종'에 관여하는 '사회법학회' 소속이었고, 나는 김근태와 함께 상대 중심의 '후진국사회연구회'라는 서클에 몸담고 있었다. 단과대학 대표 자격으로 만남이 있었던 정도였다. 결국 우리 5명을 엮어 '서울대생 5명이 국가를 뒤엎으려 했다'는 중정의 발표는 그 자체가 코미디일 수 밖에 없었다.

3선 개헌, 4·27 대선 이후 나는 죄목도 없이 수배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위원장으로 있던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에서 대선 참관인단을 만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관 학생들의 숨가쁜 보고를 종합하면 집권 여당의 부정투표는 3·15 부정선거를 뺨치는 모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수령(10월 15일)이 터진 뒤 무작정 도망을 다녔다. 이미 학교에서 제적된 상태였다. 11월 7일로 기억한다. 고대 부근 종암동에서 부정선거 규탄 집회가 있어 참가했다가 중정 요원들에게 붙잡혔다. 끌려갔더니 장기표 이신범 조영래도 잡혀와 있었다. 나의 죄목과 행적이 도표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이미 정리돼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고문과 가혹행위는 우리를 그들의 시나리오 속에 집어 넣었다. 그들이 요구한 진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학생들이 4·27 대선 후보인 김대중씨와 연관돼 있었으며, '거사' 이후 김씨를 새 대통령으로 모시려 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이 재야의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산하 기구임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분명히 둘 다 아니었다. 민주수호란 표현은 지금의 민주화나 개혁 등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화두였고, 따라서 보통명사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너희들 머리 속에 그러한 모의나 목적이 있지 않느냐"면서 공소장을 작성했다. 인간성마저 상실되는 고문을 받다 보니 '우리끼리는 그런 궁리를 하기도 했나 보다'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의 죄목은 후배 대학생들을 사주해 무장봉기를 일으켜 민주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후 김대중씨를 위원장으로 임명하며, 혁명입법을 만들어 부정부패척결법 등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을 잡아 넣는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공소장을 보면서 그 내용이 5·16 쿠데타 직후 그들의 집권 시나리오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자격지심이라고 할까, 스스로의 두려움이라고 할까.

그들은 우리의 공모를 증명하려 고민을 했다. 결국 우리는 공모한 것으로 됐다. 4명(김근태 외)이 한 자리에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군에 입대하는 동료를 환송하느라 몇몇 친구들과 함께 역촌동 조영래의 자취방에서 모였던 적이 있었다. 4명이 함께 모인 것은 그 날 뿐이었다. 중정은 우리가 그 날 (송곳이나 압정 하나 없이) 대한민국을 뒤엎을 모의를 했다고 공소장에 썼다. 이 때문에 장소를 제공한 조영래와 그의 친구 이신범은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고, 단순히 환송회에 참석했던 나와 장기표는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1년만에 석방됐다. 동료의 입대 전날 모인 환송회 자리가 '대한민국을 뒤엎기 위해 대학생들이 역모를 꾀한 아지트'로 둔갑한 셈이었다.

재야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소속 변호사를 중심으로 대규모 변호인단이 구성됐다. 법정 공방은 치열했고, 1년 가까이 재판을 끈 뒤에는 문자 그대로 용두사미가 돼 버렸다. 유신헌법이 공포(72년10월17일)된 직후 우리의 재판은 끝났다. 이후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나는 복학자 명단에서 계속 제외됐고, 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이 허용됐으나 곧바로 5·18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수배되면서 다시 제적됐다. 지금까지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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