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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60>/府民館 폭탄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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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60>/府民館 폭탄테러

입력
2003.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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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5년 7월24일,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경성 부민관에서는 이른바 아세아민족 분격대회(憤激大會)라는 것이 열리고 있었다. 조선의 친일파 거물 박춘금(朴春琴)이 이끄는 대의당(大義黨)이 주최한 이 대회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대표적 친일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본 제국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고 미국에 대한 결사항전을 선동하는 자리였다. 일본 제국의회 의원이기도 했던 박춘금이 단상에 올라가 참석자들의 박수 속에서 열정적인 친일 선동을 하던 중 갑자기 무대 뒤에서 폭탄 두 개가 터지며 대회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폭탄이 조악해서 죽은 사람은 없었으나 대회는 즉시 중단됐다. 이것이 광복 전의 마지막 항일 테러인 부민관 폭탄 의거다.부민관 폭탄 의거를 주도한 이들은 강윤국(姜潤國)·조문기(趙文紀)·유만수(柳萬秀) 등 20세 전후의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이 해 5월 서울 관수동 유만수의 집에서 민족반역자들과 일제 요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비밀 결사 대한애국청년단을 결성하고 기회를 엿보던 중 부민관에 국내외 친일파 거물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이 날 거사한 것이다. 폭탄은 대회가 열리기 전날 밤 단원들이 부민관 뒷담을 넘어 들어가 무대 뒤에서 화장실로 이어지는 통로에 설치해둔 것이었다. 대한애국청년단원들은 조직 결성 직후인 그 해 5월에도 서울의 요리집 명월관에서 박춘금을 폭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바 있다.

부민관은 경성부(서울시)가 1935년 지금의 중구 태평로1가에 세운 부립 극장이다. 해방 후 잠시 국립국장으로 사용되다가 1950년부터 국회의사당이 되었고, 1975년 여의도에 새 국회의사당이 들어선 뒤 시민회관, 세종문화회관 별관을 거쳐 1991년부터 서울시 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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