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모(61)씨는 서울 여의도 LG사옥 앞에서 집회를 열기 위해 관할 경찰서를 찾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LG의 용역업체가 사옥 정문 앞에서 각종 캠페인과 행사를 열겠다며 미리 집회 신고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두 개 이상의 집회가 같은 장소에서 열릴 경우 먼저 접수된 것만 정식 집회로 인정을 받는다.'불평등한 SOFA개정 국민행동' 이형수 간사도 종로경찰서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다. 미군기지반대 시위를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열 계획이었지만 이미 북핵시민연대라는 단체가 1년치 집회를 신고한 상태였다. 이 간사는 "매번 집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북핵시민연대에 통사정해 집회신고 취하서를 받아와야만 한다"며 "불합리한 집시법 규정으로 인해 정당한 권리를 침해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일부 대기업과 단체들이 집회 장소를 선점하는 행위가 헌법상 집회의 자유 침해 논란을 빚고 있다. 이들은 집회를 신고하고도 실제 집회를 여는 경우가 거의 없어 자신들의 입장에 반하는 집회를 막기 위한 '위장 집회신고'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서울 중구 순화동 중앙일보 사옥 앞도 마찬가지 경우. 관할 남대문경찰서에 따르면 중앙일보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고 신청한 곳은 삼성에버랜드, 조인스랜드, 중앙 M&B 등이다. 이들은 번갈아가며 12월말까지 집회를 신청, 민주노총의 왜곡보도 규탄 시위는 결국 사옥 건너편에서 열렸다.
대기업 회장 자택 근처에서의 시위를 막기 위해 회사 관계자가 미리 집회를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산업개발 정몽규 회장 집이 있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 산 5-25번지 일대에서 환경정화캠페인 명목으로 9월말까지 집회신고를 한 사람은 현대산업개발 관계자로 밝혀졌다. 이곳에서는 한 차례도 집회가 열리지 않았다. 회사측이 미리 집회신고를 한 덕분에 삼성동 아이파크 건축 문제 항의 집회를 정 회장 집 근처에서 열려던 봉은사 신도회측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신고만 하고 집회를 열지 않는 비율이 2000년 68%, 2001년 80%에서 지난해에는 84%로 증가했다. 또 1년 이상의 장기 집회신고도 늘어나 서울역, 여의도 공원, 용산 미군기지 앞 등 인기 집회장소는 올해 말까지 '집회 예약'이 끝난 상태. 민주노총 관계자는 "정당한 의사 표현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위장 집회신고를 없애기 위해서는 집시법을 이른 시일 내에 개정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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