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적으로 잘못된 협약이다. 지킬 필요가 없다", "그래도 우리가 우겨서 만든 것인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요즘 독일의 경제학자들은 '재정 건전화 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 준수 여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마스트리트 협약'으로 더 유명한 이 협약은 1999년 독일이 유럽 10개국과 공동으로 '유로(Euro)'화를 출범시키는 과정에서 강력히 요구해 체결됐다. 협약의 요지는 '재정적자를 2004년까지 GDP의 3% 이하로 줄이지 못하는 국가는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 당시만 해도 재정이 튼튼했던 독일 정부는 포르투갈, 스페인 등 가난한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악화에 따른 부담전가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협약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4년만에 독일은 자기가 놓은 덫에 걸릴 상황에 빠졌다. 2002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2%에 달하고, 2003년과 2004년에도 3.5% 내외의 적자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독일 경제는 지금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재정적자가 누적되는 가운데 경제성장률은 올들어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실업자는 넘쳐 나고 있다. 1995년 이후 2000년까지 독일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8%로 영국(2.8%)과 미국(4.1%)의 절반에 불과하다. 게다가 2001년과 2002년에는 성장률이 0.6%와 0.2%로 떨어지더니 올 1·4분기에는 마이너스 0.2%를 기록했다. 실업자는 10년만에 두 배가 됐다. 90년 6.4%였던 실업률이 올 5월 10.7%까지 상승하면서, 연말에는 실업자가 500만명에 육박할 전망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독일 경제가 일본의 전철을 밟아 장기 침체의 악순환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쯔비너 수석연구위원은 "독일 정부는 내수를 살리려고 세금을 깎아주려 하지만, 이 경우 재정적자 악화가 불가피하다"고 걱정했다. 그는 "90년대 중반 7%대까지 하락했던 저축률이 2003년에는 10.5%까지 상승했다"며 "독일인들이 불안한 미래를 걱정해 소비 대신 저축에 매달림으로써 내수부진이 가속화하고 경기는 더 하강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의 경제대국 독일이 무너지는 이유는 경제시스템의 취약성 때문이다. 독일은 2차 대전에서 '앵글로-색슨(Anglo-Saxon)'의 미영 연합군에 패한 뒤, 경제를 재건하면서 영미식 자본주의와는 다른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 시스템을 도입했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생산·소비·직업선택 등에 대해서는 시장경제의 자유경쟁을 완전히 보장하지만, 시장형태 등 사회적 질서 유지를 위해서 국가가 정책을 통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경제 사상이다.
이에 따라 근로자 임금에서 절반 가량이 세금과 사회보장비로 공제되기 시작됐다. 정부 주도로 노동시간이 지속적으로 감소했고, 심지어 음식점이나 상점 주인에게도 연간 30일은 의무적으로 문을 닫도록 했다. 또 부자와 거지가 똑같은 의료혜택을 받고,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대학까지 공짜로 다닐 수 있게 됐다.
대다수 독일 국민은 아직도 자신들의 체제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평가는 냉정하다. IMF는 지난해 10월 "과도한 복지비용과 경직된 노동시장 등 구조적 요인 때문에 독일 경제가 위기에 빠졌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과도한 통일비용과 세계경제 침체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독일 경제학자들도 이제는 구조적 문제임을 시인하고 있다. 독일연방은행은 '독일 경제, 위기탈출의 길(Way out of the crisis)'이라는 특별 보고서를 통해 "독일 경제가 시장원리에 따라 작동하도록 각종 제도와 원칙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간다운 삶'을 강조하는 독일식 경제체제가 자유로운 경쟁과 개혁을 가로막고 있으며, 독일 경제의 활력이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 경제는 세계 경제의 경쟁이 격화하기 시작한 90년대 이후 실물과 금융 모두에서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과 대만, 멕시코 등 신흥 공업국의 약진으로 90년 11.5%에 달했던 독일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2000년 8.6%까지 하락했다. 금융 경쟁력은 더욱 취약해 유럽중앙은행(ECB) 본부까지 들어선 프랑크푸르트 금융시장의 규모는 영국 런던의 5분의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익명을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한 독일연방은행의 국장급 간부는 "독일은 입씨름만으로 귀중한 시간을 소비한 채 개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독일인은 이제 과거체제의 잘못된 편안함을 포기하고 개혁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앵글로-색슨' 자본주의 대신 인간의 숨결이 느껴지는 자본주의를 추구했던 '독일의 꿈'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베를린=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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