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 됐습니다. 이 달 말이면 음반이 나올 테니 기대해 주세요." 녹음실 문을 열고 나오는 그의 얼굴이 무척 상기되어 있다.'오랜 침묵'에 대한 궁금증과 우려를 "정말 괜찮은 신인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라는 한마디로 일축한 그는 이제 '이정'이라는 22세의 남자 신인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가수예요. 어느 장르나 잘 부르지만 일단 리듬 앤 블루스 곡들로 1집을 꾸몄습니다. 틀림없이 국민가수가 될 것이고, 아시아 무대 석권까지 자신합니다." 그러면 김건모 신승훈보다도 잘 부른단 말인가. 분명히 그렇단다.
김창환(金昌煥·41)이 누구인가. 무명 신승훈을 발굴해 1집부터 5집까지를 제작하면서 발라드의 황제로 만들고, 김건모 1∼3집의 작사 작곡과 음반기획 제작을 맡으며 국내 최대판매 기록(3집. 280만장)을 작성하지 않았는가. 그 외에도 클론 박미경 노이즈 홍경민까지 배출한 스타 메이커이니 그의 흥분을 건성으로 보아 넘길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만든 음반의 판매량은 약 1,500만장을 기록중이다.
현재 CJ미디어라인의 주주이자 이사인 김창환은 국내 최초의 음반 프로듀서로서 90년부터 이 분야의 독보적 존재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라인음향 시절 소속 가수인 김건모 신승훈이 떠나면서 그의 시대도 막을 내리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꿍따리 샤바라'의 클론과 '흔들린 우정'의 홍경민으로 명성을 유지하는 듯 했지만 이마저 클론 멤버 강원래의 교통사고와 홍경민의 군입대로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두 슈퍼스타와의 결별로 인한 후유증을 이렇게 설명한다. "배신감에서 헤어나지 못해 한 2년간 슬럼프를 겪었습니다. 삶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음악 열정에 상처를 입었죠. 떡장사 해서 키운 아들로부터 배신 당한 어머니의 느낌이라고 하면 비슷할까요."
그는 프로듀서와 가수의 사이는 절대 돈으로 맺고 끊을 관계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마이클 잭슨이 오늘날 이 모양이 된 것은 히트곡 '빌리 진' '배드'를 만들어 준 퀸시 존스와 돈 문제로 헤어졌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함께 데뷔한 마돈나가 아직 건재하고 일본의 톱가수 고와타가 20년 이상 가수왕을 누리는 것은 자신을 키워 준 프로듀서들과 계속 관계를 유지한 덕분이죠." 가수에게는 '오랫동안 느낌을 갖고 자신만의 음악을 연구해 주는 프로듀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새로운 가수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80년대는 조용필, 90년대는 신승훈 김건모의 시대였죠. 그들처럼 10년을 대표하고, 내 음악을 완성 시켜줄 수 있는 가수를 찾으려면 적어도 4∼5년 걸립니다. 그동안 300명 이상 오디션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연말 이정의 노래를 들었을 때 김건모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빨려 드는 느낌을 받았고 '내 혼을 담을 수 있는 가수'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김창환은 DJ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10년 가까운 DJ 경험이 훗날 작곡가와 프로듀서로 대성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고교 1학년때부터 핑거스란 교내 그룹사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그는 81년 부모에 등을 떠밀려 대학에 입학했으나 1학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퇴한 후 강남 디스코텍의 DJ로 진출했다. 그리고는 곧 하루에 여섯 곳을 순회할 정도로 잘 나가는 DJ가 되었다. 길에서 알아 보는 사람도 꽤 있는 반연예인이었다. 디스코텍에서 일하며 외국음악을 섭렵하고 대중의 기호와 유행을 읽는 감각을 쌓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
83년에는 자신이 좋아하던 미국 DJ 젤리빈 베니테즈가 음반 프로듀서가 돼 마돈나를 자기 곡으로 데뷔 시키는 것에 영향 받아 프로듀서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아무로 나미에를 발굴한 일본 최고 프로듀서 고무라 데쓰야,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만든 데니스 팝도 DJ 출신이듯이 DJ경험은 프로듀서가 되는데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김창환이 처음으로 만든 가수는 신승훈. 신승훈은 대전에서 라디오 방송 MC와 다운타운 가수로 활동하면서 서울의 여러 음반회사를 찾아 다녔지만 모두 문전박대 당해 가수의 꿈을 포기할 단계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저 목소리로는 힘들다'고 할 때 우연히 그의 데모 데이프를 들은 김창환은 가능성을 읽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90년초 음반회사를 섭외해 일을 시작했다.
당시 앨범들은 특별한 컨셉이 없이 여러 작곡가에게서 받은 곡들을 모아 만드는 것이었지만 김창환은 수록곡들의 색깔결정부터 레코딩, 앨범 디자인과 판매까지 모두 책임지는 프로듀서로 나섰다. 그해 11월 나온 1집 '미소속에 비친 그대'는 신승훈의 투명한 목소리를 살린 밝은 노래들로 구성했다. 김창환이 쓴 '날 울리지 마'를 포함한 총 9곡중 6곡은 신승훈의 자작곡이었다. 신승훈 본인의 작사 작곡 능력이 뛰어난데다 자기가 소화하기 좋은 음역의 곡을 만들기 때문에 좋은 노래가 나올 수 있었다. 140만장이 팔렸다.
그리고 애절한 분위기로 변화를 준 2집도 150만장을 기록. 신승훈 앨범의 잇단 성공은 국내 음반업계에 프로듀서 시스템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92년에는 그룹 '평균율'로 활동했으나 재능에 비해 빛을 못 보던 김건모를 발굴했다. 신승훈과 달리 김건모의 노래들은 대부분 김창환이 직접 작사 작곡했다. 다른 작곡가들이 김건모를 읽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랩이 가미된 솔풍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타이틀로 한 1집부터 선풍을 일으키면서 3집까지 연속 대박이 터졌다.
김창환은 일본과 중화권 진출의 기수이기도 하다. 그는 97년 오키나와 페스티벌에서 20분간 클론의 단독무대를 열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클론의 싱글앨범은 2,000장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함께 만든 머라이어 캐리의 싱글앨범을 앞선 것이다. 이후 일본 음반 제작자들은 클론에게 노래를 일본어로 불러 달라며 본격적인 일본 진출을 견제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남의 말로 노래하면 감정을 100% 살릴 수 없는 것. 김창환은 "왜 머라이어 캐리나 마이클 잭슨에게는 이 같은 요구를 않고 클론에게만 하느냐"며 거절하고 대만으로 방향을 바꿨다. 거리공연과 TV 토크쇼 출연을 통해 대만에 상륙한 클론의 태풍은 순식간에 전국을 휩쓸어 무려 45만장의 음반이 팔려 나갔고 중국 태국으로 인기가 확신됐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일본에서 직접 오디션을 해 여성 3인조 '칼러'를 구성하고 곡을 써 줬다. 베이비복스의 '우연'도 그들이 불렀던 곡.
홍경민은 케이블 TV에서 발견했다. 99년 10월 발라드 곡을 부르는 것을 보고 수소문 했더니 '이미 앨범 2장을 내 망한 가수'라는 게 주변의 답. 그러나 그의 머리 속에는 발라드가 아니라 라틴 팝을 부르는 홍경민이 그려지고 있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홍경민은 김창환사단에 들어가 6개월 고생끝에 '흔들린 우정'을 발표하면서 그 해의 최고 가수로 올라섰다.
음악의 유행은 세계적으로 같이 간다. 김건모가 '핑계'를 부를 때는 레게 음악이 휩쓸었고,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가 나올 때는 마카레나 열풍이 불었다. 홍경민을 스카우트 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리키 마틴의 라틴 팝이 곧 한국에 상륙할 것을 예견했기 때문.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김창환의 감각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김창환은 작사에서도 뛰어난 감각을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시 쓰기를 좋아하는 등 문학성이 있었던 그는 음악을 좋아하면서 사물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들의 사랑이야기를 듣든, TV 드라마를 보든 무심코 넘어가지 않고 그 인물의 입장으로 들어가 보았다. 지금도 10대, 20대 때의 마음을 끄집어 내도록 애쓰며 젊게 산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 제작앨범
신승훈1∼5집, 김건모 1∼3집, 노이즈1∼5집, 클론 1∼4집 및 베스트앨범, 박미경 1∼3집, 콜라1,2집, 김태영 1집, 홍경민 3∼5집, 디토 1집, 심태윤 1집
■ 대표곡
'날 울리지 마' '오랜 이별 뒤에'(신승훈)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핑계' '잘못된 만남'(김건모)
'변명' '상상속의 너' '성형미인'(노이즈)
'이유같지 않은 이유' '이브의 경고' '집착'(박미경)
'꿍따리 샤바라' '돌아와' '초련'(클론) '몰라'(엄정화)
'흔들린 우정' '가져가' '첨이야'(홍경민) '힘겨운 사랑'(장혜진)
'편지' '짝'(심태윤) '우연'(베이비복스)
■ 수상경력
94 ,95년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KBS MBC 가요대상
96년 스포츠서울 KBS가요대상 99년 KBS가요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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