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23일 미 정부가 대북 불가침을 공식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전날 워싱턴 포스트 보도를 입을 모아 부인했다.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지금은 대북 불가침의 문서화를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말했고,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보도가 부정확하다"고 일축했다.그 동안 미 정부가 북한의 검증 가능한 핵 폐기를 일관되게 요구해온 점을 감안하면 두 대변인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북한과 마주하기도 전에 체제보장을 거론하는 것은 미국에게는 북한의 위협에 굴복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은 대 북한 체제보장의 구체적 내용뿐 아니라 체제보장을 해줄 것이냐는 것 자체를 협상의 카드로 여기고 있다. 때문에 미국은 내부적으로 여러 대북 체제보장 방안을 검토하더라도 사전에 공론화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할 가능성이 높다. 워싱턴의 소식통은 "회담 형식을 거론하는 단계에서 실질적 내용을 꺼내는 것은 미국의 전략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대북 체제보장에 대한 미국의 복안은 다자 대화의 틀 속에서 북한과의 대화가 무르익을 때쯤 드러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소식통은 "북미 대화는 결국 북한의 핵 폐기와 미국의 대북 체제보장 및 경제지원 약속을 일괄 타결하는 형식으로 전개될 것"이라며 "일괄타결 협상의 진전 양상과 맞물려 체제보장안의 구체적 모습이 가시화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문제는 대북 체제보장 약속을 어떤 그릇에 담느냐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미국이 북한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 정부의 의사는 차지하고서라도 미 의회의 비준을 얻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회 비준을 피하는 방안으로 미 대통령의 친필 서한이나 양국 고위관리의 공동성명에 합의사항 이행 보장의 내용을 담는 클린턴 정부식 보장안을 상정할 수 있다.
1994년 제네바 핵 합의 때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합의문 서명 전날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 합의문 이행을 약속했었다. 또 2000년 10월에는 조명록(趙明祿)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회담 후 상호 적대적 의사 포기를 담은 공동 커뮈니케를 발표했다. 하지만 북한이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이런 공약이 무효화했다고 비난하고 있는 데다 부시 정부도 클린턴식 해법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이 보장안의 현실화 가능성은 미지수이다.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공동으로 북한 체제를 보장하는 방안은 북한 핵 문제의 다자적 해법을 추구하는 미국의 정책에 부합하지만 미국으로부터 직접적인 보장을 요구하는 북한이 이를 쉽게 수용할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북한이 불가침 보장의 형식에 대해 다소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구두 보장보다는 문서 보장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며 "미국의 보장과 여러 국가의 공동보장을 절충하는 형식 등을 상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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