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린상고와 정신여고 교사로 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당시 나는 정신여고 화실에서 200호 크기의 '군동(群童)'을 그리기 위해 6개월 간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매달려 있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막 사인을 하려는 순간 밖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3년 여의 지루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에서도 전쟁의 공포를 체험한 적이 있는 나는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절망감에 빠져 서울을 떠나야 할지 어쩔지 몰라 고민했다.어쩔 수 없이 피란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나는 화실에서 갖고 갈 작품을 골랐다. 우선 '군동'을 둘둘 말았다. 아이들을 소재로 그린 이 작품은 내가 국전에 출품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던 것이어서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이 그림을 챙기다 보니 애써 그린 다른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모두 내 자식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림들은 마치 자기를 버릴 것이냐고 묻는 것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망설이다가 결국 떠날 시간을 놓쳐 버렸다. 인민군이 순식간에 밀려 들어왔고 나는 미술동맹에 불려가 김일성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은 나에게 맞지 않았다. 오랫동안 모델을 보며 감각적인 그림만을 그려왔기 때문에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때 인민보안부에서 나오라고 했다. 약속 장소인 커피숍에 갔더니 이북으로 끌고 갈 인사들을 모아놓고 선별하고 있었다. 한참 얘기를 하고 있던 그들에게 인사를 하자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이 나를 가리키며 그 장교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사람을 끌고 가면 어떻게 해. 가족도 있는데 데려가 봐야 짐만 되는 것 아냐?"
그 장교는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일단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그때 내가 집에 돌아오지 못했으면 그대로 북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 길로 나는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와 우선 숨을 곳을 찾았다. 한참을 헤매던 끝에 선린상고 관사가 떠올랐다. 그 관사의 마루 밑은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는 데다 겉에서 보아서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동 사무소에 모이라는 방송이 있었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며칠 동안 마루 밑에 숨어서 낮에는 누워 지내고 밤에만 겨우 기어 나와 허기진 배를 달랬다. 유엔군의 폭격소리가 커지면서 인민군들이 반동분자 색출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인민군들은 보안대 연락원들을 앞세워 집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관사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마조마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려 온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38선을 넘어갔던 국군이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고 인민군이 서울로 밀려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군동'만을 챙겨 들고 피란을 준비했다. 이때 한국군 2사단 정훈장교 김종수 중위가 찾아와 정훈부에서 같이 일하자고 부탁해 2사단에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후 미 10군단 연대장이 종군 화가가 필요하다고 해서 전사(戰史)과에서 일하게 됐는데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부산까지 밀려가게 됐다. 부산에서는 이화여고 교장으로 계신 신봉조 선생님의 도움으로 영도 기마대 옆 공터에 세운 임시 건물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때 그렸던 작품이 동족상잔의 처참한 모습을 반추상으로 표현한 '침략자'였다. 나는 전쟁의 참혹성과 비극적 현실을 과거의 리얼리즘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서구에서 유행하는 추상으로 따라가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바로 반추상의 기법이다. 아무튼 나는 휴전 후 열린 제2회 국전에 '침략자'와 '군동'을 출품했다. 선전(鮮展)과 1회 국전의 특선 작가인 나는 추천작가 자격이 있었지만 일반 출품해서 실력을 확실히 인정 받고 싶었다. 다만 나는 특선작가로서 작품 1점을 사전 심사를 거치지 않고 출품할 수 있었는데 반추상 '침략자'를 선택했다. 그때 심사위원이었던 도상봉 선생이 그러한 표현기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심지어 '침략자'를 출품하지 않으면 '군동'에 대통령상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이를 거부하자 심사위원들은 '군동'과 '침략자'를 입선작으로 뽑았다. 내가 우리 화단 풍토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게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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