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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는 없다" "편안한 남자"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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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는 없다" "편안한 남자" 전성시대

입력
200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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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손 빌려 밑 닦은 것처럼 찜찜해. 내가 원했던 게 한꺼번에 이뤄지는데. 뭐냐, 이 허허한 기분은…." 영화 '싱글즈'에서 나난(장진영)이 돈 많은 남자와의 결혼을 부추기는 동미(엄정화)에게 하는 말이다.이제 '백마 탄 왕자'는 약발이 잘 먹히지 않는다. '남의 손 빌려 밑 닦는' 느낌이라고까지 반응하지 않는가. 잘 생기고 돈 많고 자상하기까지 한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 여자 주인공을 일약 신데렐라로 만드는 스토리는 이제 진부하다. "남녀 관계는 현실이다. 신데렐라도 왕자와 결혼한 후 신분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어쩌면 이혼했을지 모른다"는 반응처럼 현실에서 왕자란 없다.

그 때문일까. 요즘은 동화적 환상을 걷어낸,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술하고도 귀여운 남자 주인공이 사랑을 받는다.

22일 종영하는 MBC 월화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현대판 왕자를 지칭하는 말인 '실장님' 동준(이현우)과 자기 밖에 모르고, 무책임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경민(김래원).

이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고, 드라마 속에서도 결국 정은의 사랑을 얻는 쪽은 경민이다. 빚을 내 도박을 하다가 할아버지에게 쫓겨난 후 정은의 옥탑방에 더부살이를 하면서도 경민은 당당하다.

오히려 "밥상에 풀 밖에 없냐"고 정은을 타박할 정도로 얼굴 두껍고, 동거 사실이 들통 나 "고시에 붙으면 1년 안에 결혼하라"는 정은이 엄마의 닦달 앞에서는 슬그머니 줄행랑을 칠 정도로 무책임하다. 사랑을 고백하는 정은 앞에서는 "같이 살다 보니 니가 여동생 같기도 하고 누나 같기도 하고 혈육의 정이 느껴진다"며 꽁무니를 빼기도 한다.

거짓말은 다반사다. 정은이 사 준 반지를 자신을 좋아하는 혜련(최정윤)에게 빼앗긴 후 사이즈가 작은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사 들고 와서 "반지를 삶았더니 쪼그라들었다"거나, "손 씻다가 하수구에 빠뜨렸다"는 등 초등학생 수준의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그런데도 시청자들은 카리스마라고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그의 '인간다움'과 '평범함'을 사랑한다. "뻔뻔하고 무책임 하지만 때로 정은을 위해 빨래를 하고 설거지도 하는 귀여운 구석이 실제 볼 수 있는 보통 남자와 같은 편안한 느낌"이라는 반응이다.

리얼리티가 살아 있어 귀여운 남자는 경민 뿐이 아니다. 멍청해 보이지만 주변에 있음 직한 남자 주인공들은 TV 곳곳에 등장한다. MBC 일일드라마 '백조의 호수'에서 황재(서경석)는 수산시장을 운영하는 부모의 보살핌으로 힘든 걸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에 의지한다. "결혼은 안 하고 평생 아빠랑 살 거야"라고 말하고 사사건건 "아빠에게 물어볼게"라고 응답하는 전형적 파파보이다.

SBS 주말드라마 '백수탈출'에서는 한 집안의 남자 3명이 동시에 백수가 된다. 아버지는 퇴직금을 몽땅 날린 후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하고 삼촌도 사업에 실패했다. 잘 나가는 농구 선수였던 아들(이정진)은 경기에서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세리머니를 펼치다가 부상을 입어 백수 신세가 된다. 하지만 세 남자가 머리를 맞대고 백수 탈출을 꾀하는 장면은 인간적이다.

시트콤에서는 한 술 더 뜬다.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SBS)에서 박영규는 직업도 없이 손위 동서의 집에 얹혀사는 처지이고 김흥수는 귀신 얘기를 들으면 밤잠을 설칠 정도로 겁이 많다. 안재환도 애인 앞에서 언제나 책임 지기 싫어 하는 소심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들의 공통점은 "결코 미워할 수 없다"는 것. '옥탑방 고양이'의 구선경 작가는 "전형적 남성상을 깨뜨린 것이 경민이가 인기를 끈 요인"이라고 말한다. "요즘 젊은 애들은 가볍고 무책임하면서도 악의가 없는 탓에 귀엽다. 다섯 번 실수하면 한 번은 잘 하는 식의 완벽하지 않은 평범함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모든 아들, 며느리가 경제권을 지닌 할아버지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김수현식 드라마 속의 남성상에 질린 것도 한 요인이다. '미디어세상 열린사람들'의 윤혜란 사무국장은 "남성들이 생활을 책임 지고 여자들은 왕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던 시절과 달리 여성도 경제력을 지닌 요즘은 가부장적이거나 몸에 힘이 들어간 '카리스마형' 캐릭터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이라고 말했다.

'똑바로 살아라'의 김병욱 PD는 "탄탄한 근육을 내세운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차인표 같은 캐릭터는 이제 매력이 없다"고 말한다.

"젊은 남자들이 여성화 하고, 여자에게 잘 보여야 살아 남는 분위기가 조성되다 보니 여성의 모성 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 귀엽고 철 없는 현실적 주인공에게 오히려 정이 가는 셈"이라고 밝혔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마초의 시대 저무나

‘사랑을 그대 품안에’(MBC)에서 차인표는 가난하지만 착하고 예쁜 여자를 구출해 신데렐라로 만드는 현대판 백마 탄 왕자의 등장을 알렸다. 이후‘별은 내 가슴에’(MBC) ‘토마토’(SBS) ‘아름다운 날들’(SBS) 등으로이어진 현대판 ‘신데렐라’에서 울룩불룩한 근육으로 마초적 남성미를 뽐내는 유학파 재벌 2세는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모래시계(SBS)의 이정재가 보여준 ‘침묵형 카리스마’는 남성미의 결정판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고현정을 지켜주고 끝내 목숨을 희생해 가며 헌신하는 그는 여성들에게 환상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현실에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 왕자님에 대한 실망감 때문일까. 1990년대후반부터는 꽃미남 열풍이 불었다. 외유내강형의 원빈, 자상한 한석규,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정우성, 아기처럼 해 맑은 미소를 무기로 한 김재원 등은 남성적 매력을 과장하기보다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성을 강조해 인기를얻었다. ‘경국지남’(傾國之男) 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그렇다면 최불암, 최민수에서 조재현으로 이어지는 마초적 남성의 시대는끝난 것일까? 비록 소수의 취향이긴 하지만 마초형 주인공은 여전히 드라마가 사랑하는 인물이다.

‘야인시대’(SBS)에서는 ‘나라를 위해 큰 일하는 남자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순종적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최근 종영된 ‘남자의 향기’(MBC)에서도 목숨 걸고 악당 같은 남자로부터 사랑하는 여자를 구출하는 안재모가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등장했다.주말 드라마 ‘죽도록 사랑해’(MBC)의 이훈은 이제는 보기 힘든 ‘건전한육체와 건전한 정신’의 남성미를 무기로 한 주인공이다. 장신영에게 끊임없이 이용당하고 배신 당해도 묵묵히 그 곁을 지키며 죽도록 사랑한다. 하지만 낮은 시청률이 반영해 주듯 이 촌스러운 남성상은 이제 소수의 취향이 되어 버렸다.하지만 정혜신 신경정신과 원장은 “평범하고 편안한 드라마 주인공이 인기를 끄는 것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남녀가 서로에게 가진 환상에 거품이 빠지면서 귀엽고 현실적인 주인공이 잠시 사랑 받는 것일 뿐마초적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갈망은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라고 밝혔다.

최지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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