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어 영국총리가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영국 생화학무기전문가의 의문사에 관한 질문으로 곤혹스런 처지가 된 일은 정치와 진실의 관계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집권 초부터 당대 최고의 총리 재목으로 평가됐고, 이라크 전쟁 승전 후 한층 인기가 치솟은 정치 지도자가 정상외교 무대에서 참담한 수모를 겪는 모습은 현실 정치에서 공허하게만 들리는 진실성과 도덕성이 여전히 고귀한 덕목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블레어는 앞서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영국 기자들로부터 "사임할 뜻이 없느냐"고 집중 추궁당하는 곤욕을 치렀다.우리 언론은 이 일을 대체로 관례를 벗어난 돌출성 해프닝으로 본 듯하다. 노대통령에게 질문하도록 지명된 영국 ITN 방송기자가 엉뚱하게 블레어를 향해 무기전문가 의문사 사건을 추궁한 것을 청와대의 반응처럼 '결례'로 보는 시각도 엿보인다. 한국 기자가 노대통령에게 대선자금 공개문제를 질문한 것도 비슷하게 치부하는 태도다. 노대통령이 "야구할 때는 야구, 축구할 때는 축구 얘기만 하자"고, 특유의 농담조로 피해 간 것을 무심하게 가십처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 언론이 정상회담 취재관행마저 무시한 것은 그들로서는 오히려 당연하다. 정부의 도덕성이 온통 의심받는 일대 스캔들이 터진 마당에, 뜨거운 현안이 없는 정상회담의 틀에 머무는 것은 너무 한가한 것이다. 그 스캔들이 국민과 나라를 전쟁으로 이끈 중차대한 정치 행위의 정당성과 직결된 상황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18일 손목 동맥을 잘라 숨진 변사체로 발견된 미생물학자 데이비드 켈리는 영국 국방부 산하 생화학전 연구소의 고위 전문가로, 1990년대 초부터 러시아와 이라크의 생화학무기 사찰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동안 유엔무기사찰단의 영국 요원을 이끌고 37차례나 이라크를 방문했고, 이라크의 생화학무기 실태를 가장 잘 아는 전문가로 알려졌다.
켈리가 스캔들에 연루된 것은 5월 말 BBC 방송 기자가 그를 몰래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블레어 정부가 확인되지 않은 이라크의 대량살상용 화학무기 위협을 거짓선전했다"고 보도한 것에서 비롯됐다. 블레어 정부는 이 보도가 거짓이라며 해명과 제보자 공개를 요구했으나, BBC는 취재원 보호를 앞세워 대치했다. 이 상황에서 영국 국방부는 내부조사를 근거로 켈리를 제보자로 공개 지목하고 나섰다. 관행을 벗어난 이런 대응은 논란의 초점을 정부의 거짓선전 여부에서, 공무원의 기밀누설과 언론의 무리한 보도 쪽으로 돌리기 위한 것으로 의심됐다.
어쨌든 켈리는 지난 주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가 여야 의원들의 집요한 질문과 추궁에 시달렸고, 이에 따른 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국방부가 기밀누설로 기소하거나,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정황을 근거로 그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는 것은 경솔할 수도 있다. 그를 핵심 증인으로 세운 의회 청문회가 블레어 정부의 전쟁 명분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국민을 기만하고 오도한 과오를 밝히는 데 이를 것을 우려한 세력이 개입했으리란 음모론도 흘러 나온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한가지 뚜렷한 것은 정권의 신뢰가 여지없이 무너진 사실이다. 블레어는 사건 직전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면서, "대량살상무기에 관해 잘못 판단했더라도, 역사는 부시와 나를 용서할 것"이라고 주장해 박수를 받았다. 후세인의 위협을 제거한 것으로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논리다.
그러나 영국 사회는 '역사의 심판'에 앞서, 거짓된 정치 행태를 직접 심판할 태세다. 블레어가 요행히 퇴진 위기를 모면하더라도, 켈리의 죽음은 그를 옥죄는 '원죄'가 될 것이란 예상이다. 노대통령이 블레어의 곤욕을 웃으며 지켜보고, 자신의 문제에 농담까지 한 것은 그런 점에서 지각없는 처신이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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