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고? 그래야 할 이유들을 한번 꼽아보라. "좋은 선생님, 좋은 학습환경, 좋은 교우, … …." 이런 식으로 답한다면 필경 둘 중 하나다. 잘 못 알고 있거나, 아니면 솔직하지 못하거나. 터놓고 얘기하자면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아이를 교육시키는 데 좋은 이유는 딱 한 가지. 온갖 종류의 수 많은 학원과 숙련된 시험 전문가들이 우글우글하다는 것뿐이다. '제 몸뚱이만한 책가방에 휘둘려 종일 학원을 전전하다 깊은 밤 지친 표정으로 술 취한 퇴근길 아저씨와 함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아이.' 전형적인 서울아이들의 모습이 그런 것이라면 지나친가? 그러니 정말로 앞서의 조건을 원한다면 오히려 분연히 서울을 떠날 일이다. 산골이나 농촌마을에 동화처럼 들어앉은 작은 학교들을 찾아서.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 사이 19번 국도변에서 찾아낸 미봉초등학교도 그런 곳이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대도시에서 공부해야 좀 더 나은 대학에 가지 않겠냐고? 글쎄, 그 불투명한 확률이 끝내 마음에 걸린다면야 할 수 없지만.
한 여름 뙤약볕은 도시인에게는 혀를 빼물 만한 고통이지만 자연에는 축복이다. 장마 틈새를 비집고 모처럼 푸른 하늘이 드러난 지난 주. 영동군 양강면 유점리 조용한 길가에 자리잡은 미봉초등학교의 풍경이 그랬다.
널찍한 운동장에는 햇살이 사금파리처럼 눈부시게 부서져 내리고, 담장을 두른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은 점점이 검은 그늘을 드리웠다. 학교를 종지그릇마냥 감싸 안은 뒤편 야산의 녹음은 이제 짙을 대로 짙었다. 볕이 뜨거울수록 사위는 더 고즈넉해지는 법. 나른하게 누운 학교 앞길을 간혹 경운기가 털털거리며 지나갔다.
돌연 까르르 웃음소리들이 깨알같이 구르더니 아이들 한 떼가 교실에서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앞 다퉈 운동장 한 켠의 원두막에 올랐다. 3·4·5학년 독서수업 시간이다. (전교생이라야 39명. 그러니 이들 세 학년을 다 합쳐도 스물 남짓이다) 서너 평 크기 원두막에서 한동안 자리를 다투던 아이들이 교실에서 가져온 책들을 펼쳐 들었다. 작은 탁자에 책을 편 아이도 있지만, 난간에 걸쳐 앉거나 아예 제 방마냥 턱 하니 바닥에 배 깔고 누운 아이도 있다. 눈길로만 진지하게 글을 좇는 아이서부터 악을 쓰다시피 낭독을 하는 아이까지 읽는 양태도 갖가지다.
아이들에게 "원두막에서 공부하는 게 더 좋으니?"하고 물었더니 "그럼요"하는 대답이 합창으로 터져 나왔다. "왜지?" "시원해요." "재미 있어요." "공부가 더 잘돼요." 참새 떼 같은 조잘거림에 귀가 따갑다. 주변의 나뭇잎은 하나 흔들리지 않는데 신기하게도 원두막 위로만 산들바람이 지나갔다.
김다희(金多熙·23·여) 교사도 한 쪽에 올라앉았다. 이따금 궁금한 대목에 맞닥뜨린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묻고는 다시 책 속에 고개를 박았다. 금세 읽기에 싫증난 한 아이가 몸을 꼬았다. "선생님, 저랑 가위바위보 해요." 이 학교 제일의 개구장이는 단연 4학년 재문이. 책 읽는 대신 컴퓨터게임 얘기로 친구들의 주의를 끌어 모았다. "우리 친척집 가면 '디아블로'도 있고, 게임이 무지 많아.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것들도 얼마나 많은데."
원두막 사다리에 앉아 제법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던 4학년 진아(여)가 문득 옆 장독대에 날아와 앉은 잠자리를 보았다. 쪼르르 내려와 주변을 돌보고 있던 고병일(高炳一·49) 교감을 졸랐다. "교감선생님, 잠자리 좀 잡아주세요." 잠자리는 놀라 달아나 버리고 "허허, 참"하는 교감선생님의 너털웃음 소리만 남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여름날 학교 풍경이었다.
원두막은 두 달 걸려 이달 초 완공됐다. 고 교감이 전임 학교에서의 경험을 살려 제안했고, 정서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이길수(李吉守·56) 교장이 팔을 걷었다. 교직원들(교장, 교감 포함해 교사 일곱에, 기능·행정직원이 넷이다)이 모두 달라붙어 직접 설계도 하고 못질도 했다. 소나무 재료는 졸업생이 마련해 주었고, 지붕은 학부모가 들고 온 볏짚으로 이었다. 옆에는 솟대를 세우고 조소를 전공한 이 교장이 손수 장승도 깎았다. 또 다른 학부모들이 크고 작은 항아리 30여개를 기증하고, 옛 농기구들도 늘어놓아 주변을 민속자료소처럼 꾸몄다. 완공일에는 마을 주민들을 초대해 한바탕 잔치까지 벌였다.
원두막 수업이 끝나자 점심시간이다. 교직원과 전교생이 강당으로도 쓰는 식당에 모였다. 식사는 규모가 좀더 큰 인근 양강초등학교에서 가져다 먹는다. 이날의 주 메뉴는 닭죽이지만 유독 탕수육 반찬에 욕심 내는 아이들에게 선생님들이 서슴없이 제 몫을 건넨다. 고 교감이 교내 사택 텃밭에서 키운 풋고추를 따와 식탁이 더 풍성해졌다. 급식당번을 맡은 학부모가 "정말 씨 좋네"라고 감탄하며 격의 없는 농담을 건넸다. 일찍 밥을 먹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라는 강아지 '짱순이'와 함께 너른 잔디밭을 가로 질러 뛰어갔다.
오후 첫 시간은 3·4·5·6학년 합동체육시간. 직접 수업지도에 나선 고 교감이 운동장에 물로 금을 그었다. 두 편으로 갈라 상대편을 금 밖으로 끌어내는 '소시지 게임'이란다. 소리 지르며 웃고 뛰어다니느라 선생님과 아이들은 햇볕에 발갛게 익고 땀에 젖었다.
모두 목이 말라진 아이들은 교무실로 달려갔다. 그 곳에 찬물이 나오는 정수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개방된 교무실을 스스럼없이 들락거린다. 아무도 겁나고 어려운 곳으로 여기지 않는다. 물을 마시다 일 하는 선생님에게 다가가 "뭐 하시는 거에요?"하고 괜히 참견 하기도 하고, 선생님 목에 팔을 감고 등에 업히며 어리광을 피우기도 한다. 1·6학년, 2학년, 3·5학년, 4학년 이렇게 4개 반마다 담임이 각기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너네 선생님, 우리 선생님이 따로 없다.
그건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이 학교 젊은 교사들 역시 대부분 전교조 소속이지만 워낙 전체가 서로를 속속들이 알다 보니 갈등 같은 게 생길 일이 없단다. "교장 선생님부터 다들 자상하시고 마음도 열려있어 전혀 문제가 없어요. 다른 학교에서는 그 말썽 많던 NEIS도 우리는 간단하게 대화로 해결했지요." 초임인 김다희 교사는 "큰 도시 학교로만 나가고 싶어했던 대학 친구들이 요즘은 나를 그렇게 부러워할 수가 없다"며 "여기서 교사 생활을 하는 게 정말 행복하다"고 맑게 웃었다.
이쯤 되면 "분위기는 좋은 것 같은데, 시골이라서 시설은 아무래도…"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천만의 말씀이다. 교실마다 대형 프로젝션 TV에, 최신식 OHP(자료 투영기)에, 학생수와 엇비슷한 컴퓨터에, 에어컨까지 갖춰져 있다. 아이들은 김천구(金千九·57) 교사가 만든 홈페이지를 통해 글짓기 숙제도 하고 선생님께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교실과 복도 바닥에는 카페트가 깔려있어 개구장이들이 아무리 레슬링 따위를 해대도 다칠 일이 없다. 더구나 비(非) 도시학교들이 대개 그렇듯 학생수가 줄면서 공간에 여유가 생겨 도서실, 보건실에 서예실, 컴퓨터실 같은 학습도움실 등 도시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사실 이 학교 아이들은 대부분 농부의 자녀들이라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다. 부모가 일 때문에 대전, 청주 등지로 나가있기도 하고 이혼 등에 따른 결손가정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 얼굴에는 한 점 그늘이 없다. 수도권에 살다 동생을 교통사고로 잃는 불행을 겪고 지난해 전학 온 앞의 재민이도 선생님과 친구들의 보살핌에 말끔하게 상처를 씻었다.
학교가 파한 뒤에도 아이들은 좀처럼 집에 가지 않았다. 몇몇은 또 원두막에 올라가 숙제장을 펴놓았다. 집에 가지않은 1학년 어린 동생들의 장난을 받아주던 6학년 준식이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곧 방학이어서 좋겠네." "아니요. 학교가 더 좋아요. 방학이 되면 좀 심심할 거에요." 이 교장은 그래서 방학 중 농번기 빈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낼 아이들을 위해 원두막 교실에서 '열린 공부방'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긴 여름 해도 어느새 설핏 기울고 운동장 느티나무 그림자도 길다랗게 드리워졌다. 아이들 소리로 재재거리던 운동장도 다시 조용해졌다. 취재를 끝내고 학교를 떠나면서 자꾸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마치 뭔가를 두고 온 듯…. 그랬다. 그 곳 작고 예쁜 학교에는 우리가 잊어 버렸던, 혹은 갖고 싶었던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을. 텅 빈 시골길을 혼자 운전해 돌아오면서 왠지 모를 그리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