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국제 유가, 쌀 작황을 보면 한국 경제의 상태를 대충 알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세계 경제의 흐름이 중요하다. 시장이 개방되어 있어 산업별로 국제 시장 전망을 봐야 한다. 또한 내수 시장도 예전보다 중요해졌다.한동안 유행처럼, 구조조정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였다. 구조조정은 경제의 효율성을 높인다. 그러나 경기 변동에는 이자율, 정부 지출, 세율 등을 결정하는 거시경제 정책이 훨씬 크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난 15년 간 한국의 경기 변동은 정치적 주기와 밀접한 연관성을 보였다. 정권 초기(1989, 93, 98년)에는 대개 경제가 좋지 않다. 그래서 새 정부는 경기를 활성화하는 정책을 쓴다. 그러면 다음 2년 동안은 경기가 좋아지고 과열되기까지 한다. 그 뒤에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고 정권 말기에는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국정 혼란이 오고 경제는 다시 나빠진다.
경기가 나쁘면 활성화 정책을 펴고 과열되면 진정책을 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두 가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정책을 시행해서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했는데도 부양책을 계속 쓰면 과열되기 마련이며, 거품이 빠지기 시작할 때 긴축 정책을 쓰면 불경기가 올 수 밖에 없다. 둘째, 한국의 소비자와 기업은 체감경기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경기 변동이 더욱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점을 감안한 절제된 경기조절 정책이 요구된다.
우리나라에서 경기조절 정책에 중용의 도가 잘 지켜지지 않는 데에는 구조적인 이유들이 있다. 우선, 총선이 정권 중반에 있는 경우 경기 부양을 하라는 정치적 압력이 생긴다. 또 하나는, 경제 정책 담당자들의 수명이 짧아 단기간에 효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정치인이나 관료의 개인적 이해가 걸려 있어 이를 극복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이는 또한 민주주의는 이루었으나 아직 선진적 제도와 관행들이 뿌리 내리지 못한 한국 정치와 관료 제도의 약점이기도 하다.
군사 정권 시절에는 경제 관료들이 장기적 안목으로 정책을 펼 수 있었다. 80년대를 예로 들면 정권 초인 80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에 높은 인플레 상태였으나 정부가 경기 부양 대신 안정화 정책을 쓰면서 다음 정권 초인 88년까지 높은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문제는 민주적인 정부에서 어떻게 도에 지나친 경제 정책을 막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은 제도적인 면에서 정치적으로 독립된 기구와 정책 결정자들의 역할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융통화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위원들의 임기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제도적 개선 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눈 앞의 정치적 이익보다 장기적 국익을 생각하는 지도자의 의지가 필요하다. 한국의 대통령은 단임이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평가 받겠다는 의지를 가진다면 가능한 일이다.
현 정부는 절제된 경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의 정책 결정 패턴이 계속된다면 힘들 것이다. 정책 결정자들이 정의감은 있으나 정책의 지향점이 불분명하고 이행 전략이 없다. 어떤 목표를 내세웠다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정반대로 가버리곤 한다.
감세 정책을 반대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이를 경기 대책으로 추진하겠다 하고, 분배를 중시하겠다고 했다가 갑자기 성장 제일주의로 해석되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국정 목표로 삼겠다고 하는 등 종잡을 수가 없다.
현 집권세력은 자신들의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 자신들의 성공이 한국 경제가 사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채 수 찬 미 라이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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