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은 선임병의 '성적 노리개'가 되는 일이 많아요. 그러나 당혹스러운 일을 당하더라도 대부분 군 생활 편하게 하기 위해 수치심을 가슴 속에 담아둔 채 견뎌냅니다." 전방지역 모 사단에서 군 생활을 한 뒤 지난 해 7월 전역한 Y(대학 2학년)군은 군내 성추행의 추악상에 대해 이같이 표현했다. 최근 자살한 육군 병사가 선임병의 성추행을 비관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모 사단의 대대장(중령)이 새로 전입 온 신병을 자신의 사무실에서 15회에 걸쳐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15일에는 충남지역의 모 군병원 군의관(중령)이 여군 간호장교를 회식장소 등에서 성추행한 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사실도 밝혀졌다.이뿐 아니다. 2001년 육군 사단장이 여군 장교를 성추행한 사실이 세상을 놀라게 했고, 2000년에는 장군이 부하 장교 부인을 성추행한 사실이 적발됐다. 두 사건을 계기로 2001년 '성적 군기문란 방지 규정'이 만들어졌으나 병영내 성추행 예방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위험수위 넘어선 병영내 성추행
가장 인원이 많은 만큼 사고 위험도 높은 육군의 경우, 지난 10년간 정식으로 보고된 성범죄는 20건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선부대의 정확한 성범죄 실상은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국가인권위의 의뢰로 지난 해 9월부터 3개월간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는 군 내 성범죄가 '레드라인'을 넘어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역 사병 232명과 전역 1년 미만의 전국 11개 대학 재학생 140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는 '복무시 성적 접촉행위를 당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9.1%(34명)가 '있었다'고 응답했다.
국방부가 지난해 정식보고된 성추행 사건 이외에 부대 차원에서 종결한 사건 등 까지 집계,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 8건에 불과했던 군 부대내 성추행은 2001년에는 35건으로 4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정대철 의원은 2000년 감사를 통해 1998년 이후 2년 6개월간 현역 장병들의 성범죄는 강간 244건과 동성간 추행 133건을 포함해 666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병영내 성범죄를 부추기는 가장 큰 요인중 하나는 성추행에 대한 군내 '불감증'이라는 지적이다. 군 관계자는 "새로 전입 온 신병의 성 경험담 발표와 가벼운 성기 접촉쯤은 별다른 문제 의식 없이 일종의 통과의례로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파악조차 되지 않은 실태
성범죄 자체가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도 수치심 탓에 공개를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 더구나 상명하복이 엄격한 군의 특성상 병영내 성추행은 침묵 속에 묻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군의 한 관계자는 "피해자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는 선에서 군내 성추행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개할 필요가 있다"며 "사건 은폐가 범죄 분위기를 더욱 조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은 13일 대대장의 사병 성추행 사건이 공개되자 홍갑식 육군참모차장을 단장으로 하는 성범죄근절 대책반을 구성, 운영토록 지시했다. 육군은 대책반을 통해 전국 부대내의 선임병 또는 지휘관에 의한 성폭행 및 성추행 실태를 정확히 파악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군의 한 관계자는 "수 차례에 걸쳐 군내 성추행에 대한 경보음이 울렸음에도 일선 부대에서 발생하는 성범죄에 대해 국방부와 각군 본부가 실태 파악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충격"이라며 군의 무감각을 질타했다. 급조된 성범죄 근절 대책이 임시방편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정호기자 azure@hk.co.kr
■ 군내 성폭력 후유증
성폭력은 육체적인 상처 외에도 '강간 외상증후군'이라고 하는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을 가져온다. 처음 2, 3주간은 폭력이나 죽음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표현하는가 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만히 있는 경우도 있다. 분명 타인의 잘못에 의한 것인데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갖는다.
이후에는 멀리 이사나 여행을 가거나 전화번호를 바꾸는 등 부지런히 변화를 꾀한다. 끔찍한 기억을 지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교통사고나 기타 대형사고의 피해자들처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건과 관련된 악몽을 꾸고,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거나 자율신경계의 항진으로 쉽게 놀라는 등의 후유증이 6개월 이상 계속된다. 평생 그 상처가 남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들은 군내 성폭력은 일반적인 성폭행보다 정신적 후유증이 더욱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용인정신병원 하지현 과장은 "군대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대체물로서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경우여서 그 양태가 더욱 폭력적이고 충격적"이라며 "피해자들이 분노나 두려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대개 침묵을 지키지만, 정상적인 자아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형태로 폭발하기까지 한다"고 말한다.
성폭력상담소 이덕화 간사는 "힘으로 제지할 수 없는 권력관계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인권침해의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성폭행은 흔히 '여자만 당하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피해자들의 수치심이 더욱 심하며, 동성애에 대한 강한 혐오감으로 왜곡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 간사는 "지난해 성폭력상담소가 서울지역 상담소에서 접수한 군대내 성폭력 피해건수는 4건이지만, 실제 피해자 숫자는 엄청날 것" 이라며 "군이 가해자를 강력히 징계하고 예방법과 대처법에 대한 지침을 만드는 등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대응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은경기자 key@hk.co.kr
■ 국방부 "성범죄와 전쟁"
국방부가 '군내 성범죄와 전쟁'에 들어갔다. 국방부는 잇단 성추행 사고와 관련, 14일 '군 기강 확립지침'을 각 부대에 시달했다. 국방부 유보선 차관은 국무회의에 참석, "조사기관과 감찰기관을 모두 동원해 전 부대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하겠다"며 "처벌 수위를 대폭 강화하는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일단 지휘관의 정신교육 등을 통해 성추행 예방교육을 강화할 계획이다. 그러나 대대장의 부하 병사 성추행과 영관급 군의관의 부하 간호장교 성희롱 사건 등에서 부하장병을 보호해야 할 책임자인 지휘관까지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지휘관을 통한 사고예방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군에서는 무기명 신고 활성화, 시민단체를 통한 성범죄 실태조사도 검토하고 있다.
현재 일반적으로 군내 성추행에 적용되는 법률은 계간(남성간 성교) 또는 추행을 한 장병에 대해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한 군 형법 92조. 처벌이 약하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군 법무관계자는 "일반 형법의 강제추행죄를 적용,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도 있다"며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간 합의가 이뤄지면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군 특성상 군내 성추행 사건의 대부분은 합의가 이뤄지기 때문에 군형법 자체의 형량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육군은 성폭력을 행사한 장병에 대해 구속은 물론 불명예 제대, 영구자격 박탈 등 엄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실제 주한미군 군사법정은 지난 해 3월 경기 의정부 미 2사단 부대 내에서 카투사 1명을 흉기로 위협해 성폭행한 미군 병장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성폭행뿐 아니라 음란, 변태행위, 허위진술, 사전 모의 혐의 등이 추가로 적용된 중형이기는 하지만 성폭력에 대한 미군의 강력한 처벌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김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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