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유럽)대륙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파운드를 버리고 유로를 사용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히드로 공항에서 만난 중년의 영국신사 에이브러햄씨. 그는 영국 정가의 최대 현안 중 하나인 영국의 유럽통화동맹(EMU) 가입에 절대 반대라고 말했다. 에이브러햄씨 같은 평범한 시민들의 반대 때문일까. 영국 내각은 최근 블레어 총리의 강력한 희망에도 불구, EMU 가입 논의를 1년 연기키로 했다. 영국 내각의 결정은 득보다 실이 크기 때문이다. 영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이 가입을 종용하고 있지만, 대륙보다 1%포인트 가량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는데 가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노쇠한 제국'으로 전락했던 영국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영국은 1992년 이후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2%를 넘어서는 등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경제 성장세를 보이면서 지난해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의 '경제 4강'에 복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02년 영국의 GDP는 1조5,557억달러로 미국(10조3,658억달러), 일본(3조9,445억달러), 독일(1조9,841억달러)에 이어 4위이다. 반면 1995년에 GDP 1조5,331억달러로 영국(1조1,349억달러)을 가볍게 따돌렸던 프랑스는 저조한 경제성장과 화폐가치 하락으로 2002년 GDP가 1조4,177억달러에 머물렀다.
영국 경제가 급부상하면서 국제통화기금(IMF)과 OECD 등은 영국 경제의 성공요인을 분석한 특집 보고서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이들 보고서들은 한결같이 경쟁원리가 작동하는 유연한 노동시장 끊임없는 개혁 철저한 대외개방이 영국 경제의 성공요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영국 남동부개발청(SEEDA)의 앤터니 더넷 청장은 "영국 경제의 성공은 경쟁과 시장원리를 중시하는 영미식 경제시스템이 독일이나 일본의 시스템에 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보기술(IT) 혁명으로 경쟁이 격화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거대기업도 10개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영국 경제의 활력을 얘기하려면 '철의 여인'으로 불린 대처 전 총리를 빼놓을 수 없다. 대처 총리가 취임하던 79년 영국 경제는 최악이었다. 평균(74∼78년) 실질 성장률은 1.25%,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은 16%와 10%에 달했다. 강력한 노조의 잦은 노동쟁의, '영국병'으로 불리는 사회의 구조적 요인들이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대처는 노동개혁부터 시작했다. 연대파업을 금지하고, 기업이 노조원만을 고용해야 하는 '클로즈드 숍'을 법으로 제한했다. 82년에는 노조대표를 선정하거나 파업을 결정할 때 비밀투표를 의무화해 조직력을 약화시켰다. 탄광노조(NUM) 등이 1년 간에 걸친 파업으로 개혁을 무산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대처 정부의 강경 대응에 굴복하고 말았다.
경쟁국에 앞서 금융시장을 개혁하고, IT와 바이오 분야 등에 투자해 산업구조를 고도화한 것도 영국의 경쟁력을 높였다. 또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 매년 미국기업이 유럽에 투자하는 자금의 40%를 빨아들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철도·가스·전력 등 네트워크 산업의 민영화 경제개방 과정에서 와해된 제조업 기반 등 영국식 개혁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경제계 일각에서는 영국의 높은 경제성장률은 거품이며, 곧 거품이 붕괴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특히 2000년 이후 런던 시내를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이 평균 50%나 치솟은 것에 대해서는 IMF 등이 거품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공공부문 민영화의 후유증도 문제이다. 대처 정부 시절 거액의 보조비를 지급 받으며 민영화됐던 철도, 발전부문 기업들이 경영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영국 전역에 8개의 핵 발전소를 갖고 있으며, 전체 전력의 20%를 생산하는 브리티시에너지의 경우 민영화 이후의 경영난으로 영국 정부로부터 10억파운드의 공적자금을 수혈 받아야 했다.
민영화한 철도 역시 레일이나 신호장치 등에 대한 정비 소홀로 열차의 연착율이 20%에 달해 시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이에 따라 시민과 철도 노조를 중심으로 근본적 해결은 공기업 체제로의 복귀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영국 정부는 여전히 민영체제 유지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런던=조철환기자 chc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