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지음 황금가지 발행·전2권, 각권 8,500원젊은이들은 서울 한 공원의 탑 아래 자주 모였다. 엘리트들이어서 공부하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친구가 나라 바깥으로 떠날 때는 모여서 환송회를 해주고, 돌아오면 환영회를 열었다. 친구가 들려주는 바깥나라 소식에 눈을 빛냈고, 새롭고 진기한 선물에 열광했다. 조선 영·정조 시대 지식인 그룹 백탑파(白塔派) 이야기다.
소설가 김탁환(35)씨가 '백탑파 이야기' 10부작 중 첫번째로 선보인 '방각본 살인사건'은 흥미로운 소설이다. 정조 즉위 2년째인 1778년 장안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추리소설의 형식이다. 사건 현장마다 놓여 있는 소설의 저자 청운몽을 범인으로 붙잡아 죽였지만 살인은 계속된다. 사건을 담당한 젊은 의금부 도사 이명방은 속이 탈 지경이다. 때마침 백탑(원각사지 십층석탑) 아래서 만난 친구들은 청운몽이 억울하게 처형당했다고 입을 모은다.
백탑파는 실존했던 집단이다.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김홍도 등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의 모임이다. 소설은 여기에 가상 인물인 화광(花狂) 김진을 보태 사건을 푸는 '탐정'으로 내세운다. 김진은 서얼이라는 출신의 한계에 갇혀진 천재이지만, 오히려 그 한계 때문에 분방하게 사고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것은 백탑파 실학자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백탑파는 압록강을 건너 연경을 여행하고, 과학을 신봉했으며, 꽃·새·물고기 등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졌다. 정조 즉위 직후는 괴한들이 궁궐에 침탈할 만큼 정국이 불안했다. 백탑파의 규장각 진출을 놓고 보수와 진보의 암투가 벌어진 때였다." 백탑파는 조선의 르네상스 기에 새것에 대한 열망으로 가슴이 뜨거웠던 젊은이들이다. 서얼이라는 한계에 보수 세력이 방해했음에도 마침내 규장각에 들어가 제 역할을 다했다.
"참여정부 수립 후 몇 달 동안 벌어진 정쟁이 떠올랐다. 386세대 정치인이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역사적 소임을 다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소설을 썼다"고 김탁환씨는 말한다. 그에게 정조 즉위 직후 난국은 참여정부 출범 직후 혼란기이며, 젊은 아웃사이더 백탑파는 정치 일선에 나선 386세대의 얼굴이다. 18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 추리 소설이지만 21세기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그래서 소설 속 범인은 비교적 일찍 잡혀도, 그 뒤에 숨겨진 섬뜩한 정치적 음모를 밝히는 데 시간이 걸린다. "챙길 건 다 챙기면서도 정국을 파탄으로 몰고 가지 않은 문화 군주 정조의 신중함은 지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고 김씨는 말한다. 그는 앞으로도 김진과 이명방이 등장하는 백탑파 이야기를 추리소설의 옷을 입혀 들려줄 참이다. 이 소설에는 또 '소설로 쓰는 소설사'에 대한 작가의 의지도 담겼다.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조선시대 필사소설이 방각본(坊刻本) 소설로 넘어가는 때다. 방각업자가 매설가(賣說家)로부터 작품을 사서 판각·인쇄·유통했으며, 독자들은 대여점에서 삯을 주고 책을 빌려보았다. '방각본 살인사건'에서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사랑은, 새 작품을 읽어보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거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뜨겁게 그려진다. 그것은 작가 김씨가 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기도 하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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