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 15일 오전 9시 40분.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접견실로 김학열(金學烈) 경제기획원, 유재흥(劉載興) 국방, 민관식(閔寬植) 문교, 신직수(申稙秀) 법무, 김현옥(金玄玉) 내무장관 등을 불러모았다. 10시 35분 양택식(梁鐸植) 서울시장은 위수령에 의거, 수도경비사령부에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비슷한 시각 문교장관은 서울시내 대학 총장들을 소집, 데모 주동 대학생의 명단을 전달하면서 이들을 17일까지 제적시키라고 지시했다. 10시 50분 김성진(金聖鎭) 청와대 대변인은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을 발표했다. '10·15 조치' 위수령 발동이었다.군사정부의 문교정책은 69년 3월 1일 구체화 했다. 대학을 병영화, 장기집권을 위한 상아탑의 순치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차 목표는 대학생 교련 과목의 신설이었다. "국가가 총무장한다는 전제 아래 적령기 대학생들이 군사교육을 받음으로써 유사시에 대비한다"고 목적을 밝혔다. 그 해 10월 17일 대통령 3선 개헌 국민투표가 통과됐다. 이듬해 2월 23일 국무회의는 대학 교련 개정안을 확정, 새학기부터 당장 시행토록 했다. 종래의 예비역 교관을 현역으로 바꾸고, 매주 2시간씩 3학년까지 실시해오던 훈련을 매주 3시간씩 4년간 총 711시간을 이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711시간 이수자에게는 현역 복무기간을 6개월 단축하는 혜택을 주기로 했다.
개학과 동시에 대학은 교련 철폐 요구로 들끓었다.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3선에 성공했다. 서울대 고대 성균관대 등은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을 결성하고 4·27 선거를 불법·부정·관권 선거로 규정했다. 교련반대는 반정부로 이어졌고, 부정선거 규탄은 군사교육 거부로 상징화 했다. 문교부는 5월 27일 서울대에 휴업령을 내렸고, 6월 1일 서울대는 처음으로 데모 학생에 대해 자체 징계조치(제명 3, 자퇴권유 2, 무기정학 17명)를 내렸다.
10월 15일 오전 11시 50분 고려대. 수경사 병력이 2대의 장갑차와 함께 진주했다. 16대의 군용 트럭을 타고 200여명이 출동했다. 눈에 띈 학생 중 여학생과 ROTC후보생을 제외한 전원이 연행됐다. 학생회관과 주요 강의실에 최루탄이 발사됐다. 학생들은 최루탄을 피해 3, 4층 유리창에 매달리다 떨어지기도 했고, 여학생들은 가스에 질색해 소방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오후 3시쯤 7대의 장갑차가 추가 배치됐다.
정오 연세대. 공수단 600여명이 진주했다. 이날 오전 전학련(전국학생연맹)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었다. 당시 전학련 대의원 손예철(孫叡徹·당시 서울대 중문과3·현 한양대 인문학연구소장)씨의 회고. "14일 명동 흥사단 본부에서 회의를 열고 신경식(한국외대 행정학과4)을 위원장으로 선출하는 등 전학련 임원진을 확정하면서 학원민주화를 위한 전국 대학의 연대감을 확인했다. 15일 오전 11시 연대 교수식당에서 전학련 공식 출범 기자회견을 가졌다. 회견 도중 어느 기자가 조금 전 위수령이 발표됐다며 대책을 물었다. 우리는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대답했다. 회견장 밖 창문을 통해 무장 군인들이 캠퍼스에 배치되는 모습이 보였다. 낮 12쯤이었다. 서둘러 회견을 마치고 우리는 뒷문으로 도피했다."
이어 서울대와 경희대, 성균관대, 한국외대, 서강대에도 중무장한 군인들이 장갑차와 군용트럭 등을 타고 들어왔다. 이날 오후 서울의 7개 대학과 전남대에 무기한 휴업령이 내려졌다. 당국은 이날 하루 동안 서울에서 학생 1,889명을 연행했다고 밝혔다. 각 대학은 17일 주동 학생 174명을 제적했다고 문교부에 신고했다. 당국은 제적된 학생들이 재입학하거나 편입학하지 못하도록 학칙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전국 84개 대학이 자체적으로 학칙을 개정해 문교부의 승인을 받았다. 국방부는 문교부로부터 제적 학생의 명단을 넘겨받아 1차로 47명에 대해 입영 영장을 발부했다. 주동학생 제적, 학칙 개정, 영장 발부 등을 완료한 당국은 23일 오전 각 대학에 주둔한 위수군에 대해 철수명령을 내렸다(위수령 해제는 11월 9일).
데모 주동자와 제적 학생의 명단을 넘겨받은 당국은 전국에 이들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연행된 학생들은 수도통합병원에서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은 후 곧바로 징집됐다. 학생 30명이 1차로 10월 26일 용산역에 집결했다. 그들은 오후 7시 40분발 285군용열차로 논산훈련소로 실려갔다. 28일 2차 입영이 있었고, 이후 검거된 학생들은 그때마다 개별적으로 강제 징집됐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 위수령(衛戍令)이란
군부대를 일정 지역에 주둔케 하여 그 곳의 경비와 질서장악, 시설물 보호를 책임지도록 하는 대통령령.
1965년 한일협정 조인으로 학생들의 데모가 폭발하자 8월 26일 윤치영(尹致暎) 서울시장이 군의 개입을 요청,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고려대와 연세대에 휴업령이 내려졌다. 이를 계기로 위수령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70년 4월 대통령령 제4949호로 정식 제정됐다. '10·15 조치'는 이에 따른 최초의 위수령이었다. 다음은 79년 10월 부마항쟁 때 발령됐으며 '10·26 사건'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97년 1월 위기사태에 대처하는 새로운 '(민·관·군)통합 방위법'을 제정했다. 현재 대통령령 4949호는 사문화했다.
최회원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70년 겨울 법대 3학년으로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선출됐다(현 신한신용정보 고문). 당시 대학가의 이슈는 학원 민주화(교련 반대), 부정부패 추방, 공명선거(4·27 대선, 5·25 총선) 감시활동 등으로 모아져 있었다.
71년 4월 6일 고려대 성균관대와 연합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교문 앞에서 가두진출을 시도하다 갑자기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는데 경찰의 곤봉을 맞았다고 했다. 곤봉이 부러진게 다행이었다. 그날 오후 형법 강의가 있었다. 총장을 역임한 유기천(劉基天·98년 사망) 교수는 "백주에 경찰이, 교수와 동료들이 보는 교문 앞에서 학생의 뒷머리를 곤봉으로 친 것은 죽어도 좋다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행위다"는 요지의 강의를 했다. 강의 후 학생들은 다시 시위를 이어갔다. '3선 개헌은 총통제 음모'란 내용의 발언으로 이미 군사정부에 미운털이 박혀있던 유 교수는 학생시위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해외로 추방됐고 생전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며칠 후(4월 13일)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과학기술원 기공식에 참석하러 서울사대 앞으로 지나가게 됐다. 데모 중인 학생들은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학생들이 던진 돌멩이 하나가 경호차에 맞았다. 30여명의 경호원들이 튀어 나왔다. 그들은 권총과 기관총을 들고 교내로 들어와 도망가는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일부 학생들을 잡아가기도 했다. 학장과 교수들이 사색이 돼서 달려왔다. 박 대통령은 차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린 학장에게 "학생들 교육 똑바로 시키시오"라고 크게 꾸짖고 떠나갔다.
2학기 들어 개인적으로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모종의 조치'를 내리기 위해 오히려 격렬 시위를 방조, 혹은 조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무장군인 고대 난입(10월 5일 새벽)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10월 들어 데모는 소강상태로 들어섰다. 특히 15일은 서울대 개교기념일이라 강의도 없었다. 전날 교내에선 국제세미나가 열렸고, 체육대회도 있었다. 다른 대학들도 축제나 행사가 잦은 시기였다. 등교 길에 버스에서 보니 학교에 탱크와 장갑차가 도열해 있었다. 피신하면서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내에 있던 동지들이 모두 붙잡혀 갔다고 했다.
위수령 발동과 동시에 데모 주동자에 대한 연행과 수배가 시작됐다. 붙잡힌 학생들은 26, 28일 논산훈련소로 끌려갔다. 일단 잠행했다. 이미 제적을 당한 상태였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 도망만 다니는가.' 11월 초 동대문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 나는 눈이 가려진 채 곧바로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네가 여기 온 것은 물론, 죽어서 나가도 아무도 모른다"며 고문이 이어졌다. 나의 진술과는 별도로 그들은 이미 배후조종자, 총책, 행동대원, 단순가담자 등으로 '운동권 조직표'를 작성해 놓고 있었다. 이것이 '서울대생 예비 내란음모 사건'의 근거가 됐음은 나중에 알았다.
11월 17일 서울대 학생과장이 남산으로 찾아와 나의 신병을 인수했다. 곧바로 입영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날로 입대했다. 최전방 소총수로 배치됐다. 고된 훈련과 작업은 견딜 수 있었으나 선입견을 가진 고참들의 박해와 구타가 더 큰 고충이었다. 부대가 철책선 근처로 이동할 때 월북 가능성이 있다며 제외시켰던 일 등이 가슴 아팠다. 부대마다 2, 3명씩 흩어져 있던 강제 입영 동지들이 주말마다 교회에서 만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복무를 마치고 74년 8월 복학했다. 2학기 등록 후 재입영 통지서가 날아왔다. 헌병대가 우리를 잡으러 다닌다는 말도 들렸다. 71년 당시 우리가 교련 수강을 거부하자 당국은 '이번에 교련을 받지 않으면 그동안 받았던 교련 학점을 무효화해서 군 복무기간 단축 혜택을 박탈한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그것이 나중에 법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전방 부대에서는 이것을 모르고 1∼2개월씩 복무기간을 단축해 주었다가 나중에 행정착오라며 다시 입영하라는 것이었다. 나와 몇몇이 대표를 자임해 군 관계자를 만났다. 그는 법률적으로 불가피하니 겨울방학 기간에 재입대 하라고 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언론에 알렸고, 결국 재징집 방침은 철회됐다. 30년이 지난 요즘도 헌병에 붙들려 입대하는 가위눌린 꿈을 가끔 꾼다. 나 뿐 아니라 동지들도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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