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모두 지난 대선자금을 공개하고 검증을 받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한국정치의 구태를 답습하는 것이어서 국민을 짜증나게 한다.한국정치의 병폐는 남북한 관계와 마찬가지로 여야가 '적대적 의존관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도 떳떳하지 못하지만 너 또한 떳떳한 것 없고, 나도 잘한 것 없지만 너 또한 잘한 것 없으니 같이 죽든지 아니면 서로 모른 척 하자는 식이다. 적대적 의존관계의 특징은 남이 잘못한 것을 핑계로, 자기의 잘못도 정당화하자는 것인데, 노 대통령의 발언은 바로 이것의 적나라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낡은 정치 타파라는 선거공약을 스스로 무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전혀 그답지 않은 처신이다.
민주당의 신당문제는 청와대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고, 대선자금 문제도 당이 자금을 모금·집행했기 때문에 전혀 모른다고 하던 노 대통령이 노회한 집권여당 대표의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협박이 있고서야 여야의 대선자금 공개를 제의한 것은 그에 대한 국민의 믿음을 배신한 행위이다.
노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바로 노무현다움에 있었다. 자신에게 불리하지만 원칙과 소신을 지키고, 명분과 솔직함을 잃지 않으며, 서민들의 한숨을 가슴아파하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으리란 국민들의 기대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원칙과 소신, 명분과 솔직함은 온데 간데 없어졌다.
몇 년 전 우리 국민들은 치욕스러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경험하면서, 정치의 실패가 결국 모든 것의 실패로 귀착된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누적된 고비용·저효율 혹은 무효율·역효율의 정치구조가 우리 경제의 위기를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위기상황에 능동적·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은 우리의 국가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정치 부패를 근원적으로 척결하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의 개혁과 진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번 대선자금의 파문을 보면서 정치개혁은 정치권의 몫이 아니라 바로 국민의 몫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한마디로 이번 대선자금 파문은 국민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정치개혁의 궁극적 목표인 '투명한 정치' '돈 안드는 선거'의 실현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국민을 허탈하게 만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참여정부가 진실로 국민을 대통령으로 생각한다면, 국민에게 고백할 것은 고백하고 이해를 구할 것은 구하기 바란다. 솔직한 고백까지 단죄할 만큼 이해심이 부족한 우리 국민도 아니며, 지금의 야당이 과거 여당이었을 때 어떻게 정치자금을 모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정치에서 정치자금에 관한 한 상대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정당은 없다. 흔히 정치인들은 정치란 악의없는 속임수라는 변명으로 사건의 진실을 감추려 한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루게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국민이든 말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공(功)은 아랫사람에게, 과(過)는 자기책임으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이다. 노 대통령이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쯤 대통령은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를 반추해볼 시점에 와있다. 노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정직한 링컨 대통령의 모습으로 스스로 거듭나기를 바란다면, 필자의 기대가 너무 크거나 순진하기 때문일까.
송 병 록 경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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