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수 지음·김용선 그림 다림 발행·7,000원·초등 고학년 이상일제시대와 전쟁을 차례로 겪고 가난에 찌들어 살기가 힘들기만 하던 시절, 시름에 겨운 어른들 옆에서도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온종일 뛰놀고 배가 고파 기운 없이 드러누운 채 밤하늘 별을 헤며 곤한 잠으로 빠져들던 아이들.
소설가 오영수(1914∼1979)의 단편 4편을 묶은 이 책은 요즘 아이들에게는 까마득한 옛일로 낯설게만 느껴질 것 같다. 지금부터 50∼60년 전,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꼬마였을 때 이야기를 담고 있다.
표제작 '요람기'는 일제시대 어느 산골 소년이 겪는 사계절을 그리고 있다. 기차도 전기도 없는 산골에서 라디오도 영화도 모르는 소년은 동무들과 함께 종일 산골짝을 쏘다니며 자란다. 봄에는 들불놀이, 너구리잡기를 하고, 여름이면 멱을 감다가 참외서리를 하고, 가을이면 콩서리를 해서 구워먹고, 겨울이 오면 여러 가지 모양의 연날리기를 한다. 그리운 눈길로 돌아보는 그 시절 추억 속에 윤초시네 머슴 춘돌이가 있다. 춘돌이는 어른이지만 동네 꼬마들의 친구다. 물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끼이룩 하고 뛰게 된다"고 겁을 줘 아이들이 잡은 물까마귀를 구워 혼자 먹어치우고, 콩을 구워 먹을 때도 아이들 더러 "범버꾸 범버꾸" 하라고 시키고는 저 혼자 냠냠 해치우는, 그러나 밉지 않은 어른이다. 여름 밤 모깃불 피운 마당의 평상에 얌전히 앉아 수를 놓던 누나도 있다.
소박하고 따스한 정감이 넘치기는 나머지 세 편도 마찬가지. '남이와 엿장수'는 남의 집 식모살이하는 남이와 엿장수 총각의 순박한 사랑을 애틋하게 보여준다. 남이가 아끼는 옥색 고무신을 주인집 꼬마들이 엿 바꿔 먹는 바람에 실랑이를 벌이다가 슬며시 정이 드는 두 사람. 엿장수 총각은 남이 주변을 뱅뱅 돌면서도 속마음 한 번 털어놓지 못하고. 그러는 새 남이는 딴 데로 시집을 간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엿장수가 사 준 새 고무신을 가슴에 안은 채. 전쟁으로 헤어진 누나를 그리워하는 소년의 슬픔을 밤하늘 별을 통해 서정적으로 그린 '누나별', 전후 서울을 배경으로 구두닦이 소년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따뜻한 인간애로 바라본 '후조'(철새)에는 전쟁의 아픔이 배어있다.
지은이는 맑고 간결한 문체에 푸근한 인정의 숨결을 불어넣어 이야기를 짰다. 합판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삽화의 거칠거칠하면서도 자연스런 맛은 글과 잘 어울린다.
나이 많은 어른들은 이 책에서 잃어버린 순수의 시대를 떠올리며 아련한 향수에 젖을 것 같다. 흙 냄새, 사람 냄새 훅 끼치는 오영수 소설의 각별한 재미를 콘크리트 숲에서 컴퓨터게임에 파묻혀 자라는 요즘 아이들에게 선물하고 싶다면, 어른들이 이야기마다 설명 한 자락은 거들어야 할 것 같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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