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분식회계를 추궁하고 감시해야 할 외부감사인(회계법인)들이 최근 어정쩡한 '면피성'감사의견을 남발, 부실회계를 도리어 부채질하고 있다. 이 때문에 피감 기업의 분식 여부에 대해 명확한 판정을 유보하는 '한정의견'제도를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한정의견'쏟아내는 회계법인들
16일 금융감독원과 회계법인들에 따르면 12월 결산법인 중 상장기업 12곳과 코스닥 등록기업 중 9곳이 2002년 사업보고서에 대해 외부감사인으로부터 한정의견을 받은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코스닥 기업만 해도 2001년도에는 12월 결산법인을 포함한 모든 법인 중 단 4곳만이 한정의견을 받았는데 1년 사이에 그 수가 두 배나 넘게 폭증한 것이다. 모 회계법인은 코스닥기업 P사가 지난해 147억원의 적자를 냈고 전 대표이사가 자금을 불법 유용해 유동성이 급격히 악화했다며 '계속기업으로서의 불확실성에 따른 한정의견'을 냈다. 다른 회계법인도 코스닥기업 E사에 대해 "심각한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한 자금조달 대책이 요구되나 회사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며 같은 내용의 한정의견을 냈다.
비상장사의 경우 회계법인의 한정의견 관행은 더욱 일반적이다. 비상장 외부감사법인 가운데 한정의견을 받은 기업은 1999년 599곳, 2000년 635곳, 2001년 725곳으로 늘었으며 지난해엔 800곳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체 외감기업의 10% 정도는 해마다 자체 작성한 재무제표에 대해 한정의견 판정을 받는 셈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면죄부'
문제는 집단소송제 도입과 시민단체의 감시강화 등으로 갈수록 책임 부담이 커지고 있는 회계법인들이 한정의견을 책임회피용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것. 현행 회계 기준상 회계법인의 감사의견은 크게 적정-한정-부적정-의견거절의 4 단계로 구분된다. 부적정이나 의견거절은 말 그대로 회사측의 재무제표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으로 해당기업은 곧바로 증시 퇴출 등의 중징계를 당하게 된다.
반면 한정의견은 회계법인이 재무제표의 일부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단서를 달긴 했지만 사실상의 적정의견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피감기업에도 피해를 덜 주고 회계법인은 부실감사의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편법인 셈이다. 실제로 회계법인들은 지난해부터 정부가 '감사범위제한 한정의견'을 받은 코스닥기업을 즉시 퇴출토록 기준을 강화하자 궁여지책으로 '계속기업으로서의 불확실성에 따른 한정의견'(퇴출기준 제외)을 쏟아내며 교묘한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
금융계 관계자는 "회계법인이 한정의견을 내는 것은 '제대로 확인이 안됐으니 알아서 투자하라'며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투자자에게 전가하는 꼴"이라며 "회계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선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도 "선진국의 경우 회계법인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감사의견은 사실상 적정 아니면 부적정 두 가지 뿐"이라며 "한정의견의 악용소지를 없애기 위해 제도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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