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카고'를 뉴욕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이번 영국팀의 내한 공연은 세 번째 무대인 셈이어서 사실 별 기대를 품지 않고 보러 갔다. 하지만 12인조 밴드의 멋진 재즈선율을 들으며 극장을 나서는 순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문화적 충족감이란…. '시카고'는 나를 또 다시 행복에 빠뜨리는 작품이었다.뮤지컬 '시카고'는 천재적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밥 포시에 의해 태어난 작품이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연출가 월터 바비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버전이다. 천재성에 의해 탄생된 육감적이지만 통속적이지 않은 춤, 1920년대의 뜨거운 시카고 무드를 그대로 살린 재즈선율, 절제된 무대장치와 검정색 의상, 희화화되고, 풍자적이며, 정형화했지만 진한 페이소스를 남기는 연기가 '시카고'의 색깔이다.
차갑고 냉혹한 법정과 언론을 배경으로 한 여죄수들의 이야기는 마치 동시대의 이야기처럼 냉소적으로 우리 사회를 비판한다. 뮤지컬은 영화만큼의 화려함은 없지만 관객의 상상력을 최대로 발휘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2000년 '시카고'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초연됐을 때 나는 가수 인순이 언니와 함께 주인공 록시 역을 맡았다. 한국 배우들이 하는 공연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각색을 했다. 예를 들어 록시가 남자 코러스에 둘러싸여 노래를 부르는 부분에서는 '인순이와 리듬 터치'를 생각해 "팀 이름을 정해야 겠어. 록시와 벌떼들? 록시와 리듬 터치!"이런 식으로 각색을 하니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등 반응이 좋았다.
원어로 공연을 하니 재미있는 부분도 관객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6명의 여죄수가 나와 살인한 이유를 하나씩 설명하는 부분은 비속어의 재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부분인데도 그냥 넘어갔다. 영국팀이 웃기는 장면에서 연기로라도 약간 오버를 해줬으면 웃음을 유도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 진지하고 심각했다. 관객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현지화가 필요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본고장의 무대와 연기는 안정적이었다. 록시 역을 맡은 배우는 유명한 배우가 아니었는데도 노래와 춤, 연기 3박자가 탄탄하게 어우러져 웨스트엔드 뮤지컬 배우층의 두터움을 보여줬다. 다만 내가 다시 록시 역을 맡는다면 멍청하지만 사랑스러운 살인자인 록시의 성격을 좀 더 입체감 있게 표현해 보고 싶다. 이번 공연에서는 록시 특유의 백치미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시카고'의 배우들은 몸매와 음색 등에서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록시의 남편 아모스 역은 대단한 호연이었다. 흑인이 맡아 파격적이었던 변호사 빌리 역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 연기를 잘 소화했다. 그러나 마마 모튼 역은 좀 더 진한 목소리가 아쉬웠다. 영국팀의 벨마는 에너지가 넘치지만 단단한 카리스마는 부족했다. 전체적으로 배우 각자의 개성을 팍팍 드러내는 '스타성'은 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사다리와 의자, 검정색 망사스타킹 뿐인 차가운 검은색 무대가 내게는 고가의 특수장치보다도 더 섹시하고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었던 건 흥겨운 몸짓과 집중력으로 최고의 무대장치와 배우 역할까지 해준 연주자들 덕분이었다. 거기에 아름다운 몸매를 악기 삼아 에너지 넘치는 춤과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의 고른 역량이 빚은 앙상블도 빛났다. 공연은 8월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 1544―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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